몇 십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지역의 한 대학에서 법과대학 학장 선출을 놓고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양측의 절충안으로 학장 선출을 마무리했지만, 그 후유증은 한참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그 대학 총장은 법과대학 교수들에게 “법학을 가르친다면서 당신들이 법을 제일 안 지킨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법학을 가르친다면서 당신들이 법을 제일 안 지킨다”는 지역 대학 총장의 일침처럼 우리나라에서 법을 제일 안 지키는 사람은 바로 ‘국민의 대표’라고 떠드는 국회의원들인 것 같다. 국회의원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가 법안 발의라고 할 수 있는데, 법안을 발의하는 국회의원들이 분명히 법에 명시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법을 어기는 것을 예사로 아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638조 7,000억원 규모의 2023년도 예산안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 24일 새벽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우리나라 헌법 제54조 제2항은 “정부는 회계연도마다 예산안을 편성하여 회계연도 개시 90일전까지 국회에 제출하고, 국회는 회계연도 개시 30일전까지 이를 의결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올해도 역시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인 12월 2일까지 2023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결국 22일이나 늦은 24일에서야 지각 처리하고 말았다.

국회의 예산안 지각 처리는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국회는 지난 2002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12년 동안이나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지키지 않았고,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지난 2014년 5월 여·야 합의로 국회법을 개정하여 정부편성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를 도입했지만, 법정시한을 준수한 것은 2015년도 예산안과 2021년도 예산안 단 두 차례에 불과하다. 물론 지난 2014년 5월 국회법 개정 이후 올해처럼 22일이라는 장기간 동안 예산안이 지각 처리된 적은 없었다. 여차했으면, 지난 1960년 헌법에 준예산 제도가 도입된 이후 사상 초유의 준예산 운영 사태가 초래될 수 있는 지경이었지만, 가까스로 준예산 운영의 초래를 막은 것만이라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자조섞인 말까지 나오고 있다.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인 12월 2일을 넘기며 여·야의 예산안 합의가 도출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가면서 서민들은 가슴을 졸이며 2023년도 예산안 처리가 연내에 마무리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만약 2023년 예산안이 여·야 합의 도출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올해를 넘겨 내년에 사상 최초의 준예산 체제로 운영됐다면, 의무지출과 공무원 급여 등 최소비용만 집행이 가능하여 예산의 절반가량인 재량지출 집행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복지사업도 중단돼 저소득층·노인·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직격탄을 맞게 될 위기에 처할 뻔했다. 또한 세계적 경제 불황 속에 그렇지 않아도 고금리·고물가와 더불어 수출의 지속적 하락으로 인해 기업들이 허덕이는 상황에서 수출지원이나 인프라 등 사회간접자본(SOC) 사업도 중단돼 경기 회복에도 심각한 타격을 초래하게 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당리당략에만 매몰돼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조차 지키지 않는 국회가 과연 ‘국민의 대표’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문이다. 국민들은 국민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당리당략에만 충실한 국회의원을 원치 않으며, 오로지 공천권자만을 바라보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을 섬기는 국회의원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제라도 국회는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을 넘기는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예산안 처리 법정시한 뿐만 아니라 2024년 실시되는 제22대 총선의 선거구 획정 역시 반드시 법정시한을 지켜야 한다. 공직선거법 제24조의 2 제1항은 “국회는 국회의원지역구를 선거일 전 1년까지 확정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국회는 예산안 지각 처리와 마찬가지로 국회의원 선거구 역시 지각 획정이 거듭돼 왔다. 22대 총선 일정이 2024년 4월 10일로 확정된 가운데, 선거구 획정 역시 공직선거법 제24조의 2 제1항의 규정에 따라 2023년 4월 10일까지는 반드시 정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이번 2023년도 예산안 처리에서 볼 수 있듯이 선거구 획정 법정시한도 지켜지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은 杞憂(기우)에 불과했으면 한다.

대다수 국민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바라는 것은 ”제발 당신들이 만든 법을 스스로 지켜달라”는 것뿐인데, 과연 국민들의 이 같은 요구가 그렇게 지키기 힘든 것인지 국회의원들에게 묻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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