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누나를 보내면서-

또다시 눈부신 봄이다.
개나리, 목련, 산수유 봄꽃들이 화사하다.
흐드러진 꽃 가운데 유독 진달래가 선연하다. 진달래꽃을 이별의 정한(情恨)이라고 했던가. 애닯기가 그지없다.
이유는 일주일 전, 곱디 고운 누나가 갑작스레 별세했기 때문이다.
먼저 독자 분들께 양해를 드린다. 이번 글은 세상 떠난 누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희수(喜壽)의 나이지만 평균수명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안타깝고 애절하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사업에 실패했다. 변변치 못한 아들로 인해 고단한 여생을 보냈다.
나는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작고한 누나는 해방둥이 둘째 누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살던 누나는 부모 격이었다.
1967년쯤으로 기억된다. 누나는 광화문 국제극장에서 만화영화 '황금박쥐'를 보여줬다.
고등학교 때에는 종로 2가 화신백화점에서 교복을 맞춰줬다.
연로한 부모님을 대신해 덕수궁의 로댕전과 중앙청박물관도 함께 구경했다. 1994년 서울에서 모 신문사 재직할 때 주중에는 누나 집에서 잠시 기거했다.
이렇게 추억이 많았던 누나가 홀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생전에 은혜를 갚아야 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코로나 때문이라고 둘러대도 송구함이 크다.
그저 한 일이라고는 연락이 두절된 조카 대신 상주 역할을 했을뿐이다.
이제 조카를 찾아서 유품과 보험금과 전세금, 통장예금을 돌려주는 일이 남았다.
한식 날 서울시립묘지에 안장했다. 날씨는 천국처럼 청명했다.
공교롭게 바로 위 오빠인 셋째 형님이 그곳에 묻혀 있다.
두 남매가 천상재회를 했으니 위안을 삼는다.
다섯 살 터울인 두 분은 생전에도 각별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껄껄껄'하며 숨을 거둔다고 한다.
'베풀걸 참을걸, 즐길걸' '3껄'이다.이런 후회는 남아있는 산자도 이와 같다.
'자주 볼걸, 잘해 줄걸, 추억을 나눌걸' 아쉬움의 '3껄'이다.
누나와 조카, 두 사람 간 '인정과 부정'을 지켜보다 안이한 동생이 됐다.
이런 안이함은 누나에게 미안함으로 남았다.
주체하기 힘든 감정은 또 있다.
부모의 상(喪)은 자식의 얼굴이다. 반면 자식의 혼사는 부모의 얼굴이라 했다.
형제 친적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죽은 정승보다 산 정승의 죽은 개는 문상한다고 한다. 이 말이 새삼스럽지 않은 장례를 치렀다.
이렇게 봄바람에 복사꽃이 흩날리듯 누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벽제승화원의 화장 문제로 부득 5일장을 치렀다.
대전으로 내려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어제는 양수리 팔당공원에 모신 부모님을 찾아 누나의 별세를 고했다.
어느덧 부모님과 형님 두 명, 누님 두 명, 여섯 분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5남매가 남았다. 절반이 넘는 혈육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더욱 슬픈 것은 형제간의 우애다.
형제들도 자식들이 장성해 모두 결혼을 시켰다. 게다가 손자 손녀를 두고나니 형제들은 뒷전이다.
그래서 부모님 살아실제 형제라고 하는가보다. 각자 일가를 이루고 가족을 부양하느라 소원해 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 속에 심신이 무겁다. 한 팔이 잘려나간 듯 허탈하고 공허하다. 죽음에 대한 상념이 꼬리를 문다. 생로병사의 순환일 뿐이다. 춘하추동의 정행(正行)이 아닐까 싶다.
또 윤회로 보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그 끝은 안식일 것이다. 긴 여정을 끝낸 망자의 평온한 모습이 그러하다. 좁은 골목길 같은 삶을 가슴 졸이며 살아냈던 고단함도 읽힌다.
그렇다면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이민홍 시인은 삶을 이렇게 설파했다.
"수없이 반복되는 습관처럼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그렇게 산다.
삶이 너무나 힘들어도 세월은 위로해주지 않는다.
버거운 짐을 내리지도 못하고 끝없이 지고가야 하는데
어깨가 무너져 내린다.
-중략(中略)-
죽음의 끝이 다가와도 애절하게 삶에 부질없는 연민을 갖는다.
산처럼 쌓아 둔 재물도 호사스런 명예도 모두 벗어 놓은 채
언젠가 우리는 그렇게 떠나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삶이란 그런 것."
시인의 말처럼 삶은 한낱 반복되는 일상이다.
어느 날 누구에게나 찾아오고야마는 확실한 사실이 죽음이다.
그러니 어제 내린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 일이다.
또한 내일의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펼칠 이유도 없다.
누님을 보내드리면서 얻은 깨달음이다.
마음을 추슬러도 아릿한 봄이다.
올 봄에는 꽃잎이 어떻게 말을 걸어오는 지, 귀 기울여 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