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그의 일생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삶의 연속이었다. 국가를 위하여 싸우자고 함께 다짐했던, 전우들을 먼저 간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용서를 빈다. 차라리 그가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면 영광스러운 마지막이 되었을 것이라고 표현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정의롭게 살고자 노력했던 그의 군 생활은 파란만장 그대로였다. 부하들에게 강력한 교육훈련과 전투진지 요새화 등 많은 것을 강조하고 요구한 것은 지휘관 본연의 자세다.변화무쌍 세상 속에서 그의 애국심은 만고불변할 듯하다. 본인은 “머리 안 좋다”,
저 이름 모를 산과 들에서 적과 싸우다 쓰러질 적에 다친 상처를 싸매주고 물을 먹여 주며 마지막에는 시체를 거두어 주는 것도 전우임을 인식하여 철석같은 단결을 하여야 한다.병사들은 “소대장님, 분대장님, 위험합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면서 눈을 감는다. 이 때 옆에는 형제와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오직 전우만이 있을 뿐이다.- 이진삼 - 최초 사단장★★참모총장 황영시 장군은 사단장 결정이 되자 총장실로 나를 호출하였다.1980년 7월 29일, 사격지도단장을 마치고 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직 받은 지 28개월 후인 1982년 12월 6일
전방 연대장1977년 8월 4일, 전방 20사단 6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군에서는 연대장과 사단장을 가장 보람 있는 지휘관이라고 해서 흔히 ‘지휘관의 꽃’이라 부르곤 한다. 그만큼 연대장은 지휘관으로서는 최고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연대장으로 간 20사단은 전방 GOP사단이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곽영배 장군이 참모총장의 결재를 받아놓았다. 곽 장군은 내가 보안사에서, 참모장으로 모셨던 분이다. 내가 올렸던 결재를 한 번도 반려하거나 부결시킨 적이 없을 만큼 나에 대한 신뢰가 돈독했다. 내가 대대장으로 나가기 전, 육군대
오기로 윤필용 예비역 장군을 찾아가다감옥에서 나왔지만 윤필용 장군은 여전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 나는 전투복을 입고 대방동에 살고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몸을 사렸지만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벨을 눌렀다. 낯익은 운전기사가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아무도 못 오시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면서 문을 열었다. 현관까지 나온 윤 장군도 나를 확인하고는 집안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해관 엄마, 이진삼 대령 왔어”윤 장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형님, 고생하셨습니다.”“이
버티고 살아남다“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15사단에서 13개월이 지날 무렵, 1974년 4월부터 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버티고 살아 있으니까 서울 육군본부의 장군, 대령 선배들이 ‘이진삼을 빨리 서울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진급시켜야 한다’는 소식이 전방까지 들려왔다. 대령이 되어야 하는데 15사단의 부연대장으로는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7사단, 15사단, 27사단과 군단까지 대령 진급 해당자들이 40여 명이었다. 부연대장으
노란 편지의 의미삶이란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더러 맴돌기는 하지만 한 자리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갈 수밖에 없다.1973년 3월 23일, 윤필용 사건으로 15사단 부연대장으로 쫓겨 가기 일주일 전 일요일 오후, 8사단 박노영 사단장은 주말을 빌어 전방으로 온 우리 가족을 관내인 산정호수 근처 조용한 식당으로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사단장이 대대장 가족을 불러 식사하는 예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 자리에서 박 사단장은 내게 “서울 소식을 들었나?” 하고 물어왔다. 못 들었다고 대답하자 윤필용 사건을 알려주었다.
칼자루 쥔 강창성육사 8기 윤필용 장군과 동기생 강창성 장군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평상시 표면화되진 않은 상태였다. 많은 선배와 후배들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다. 윤 장군과 친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윤 장군이 아끼던 육사 11기 권익현(보안사), 손영길(수경사참모장)을 비롯하여 12기 정동철(보안사), 이광근(보안사), 13기 황진기(보안사 인사과장), 신재기(육본진급과), 14기 배명국(보안사 인사과장), 박정기(수경사 비서실장), 그리고 15기인 이진삼(보안사 인사과장)을 포함했다. 이 사건으로 총 8명이 전역조치 되었
저희 대대는 이 없습니다5군단장이 8사단 1개 대대를 순시하겠다고 사단에 지시하였는바 8사단에서는 21연대 3대대를 순시하도록 보고했다. 모자와 양 어깨에 번쩍번쩍 하얀 별 3개씩 총 9개의 별을 단 그 이름도 무서운 유병현 군단장이 차에서 내렸다.나는 부대대장, 중대장 참모들과 도열하여 경례하고 군단장을 안내해 대대장실로 향했다. 군단장은 대대장실 입구에서 영접하는 사단장 박노영 준장, 연대장 노태우 대령과 악수하며 인사했다.빈약한 토막사 대대장실에서 브리핑을 받던 군단장이 갑작스레 취사장으로 향했다. 군단장은 취사병들의 사타구니
8사단 21연대 3대대장1972년 1월 27일, 8사단 21연대 3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포천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처음 부대에 도착해 파악한 것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였다. 지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늘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처럼 병사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첫째도 임무, 둘째도 임무, 셋째도 임무였기에 임무수행을 위한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강조했다.전투의 3대 필수 요소가 정신, 체력, 전투기술이다.부대는 무엇보다 초급간부인 분대장, 선임하사, 소대장, 중대장에게 달려 있다. 한번은 소대장들의 BOQ(독
샛길에서 나와때를 기다렸다. 내 꿈은 전투부대 전투군인으로 기회만 살피고 있었다. 남들은 그 좋은 부대를 왜 나오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내 길은 원래 그 길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방첩대에서 특공대장, 파월 기동대장, 부대 대공과장, 사단 보안부대장, 보안사령부 인사과장까지 7년의 기간은 샛길이었다. 화려한 버섯일수록 독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는 내게 있어 화려한 독버섯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 10월부터 2년 예정인 직책을 사령관에게 사양하고 1971년 8월 10개월 보직을 끝으로 보안사령부를
윤필용과 김재규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윤필용 준장과 김재규 소장,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육사 기수로는 2기인 김 장군이 8기인 윤 장군보다 선배였지만 나이는 별 차이가 없었다.윤 장군 입장에서는 능력과 인품 특히 청렴도 등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보안사령관을 맡아 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 통수권자를 제대로 보좌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반면 김 장군은 자신이 육사 선배인 데다 박 대통령의 동향 후배라는 권위를 내세워 윤 장군이 자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 사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 1·21사태의 재구성 Ⅱ 도주로 차단작전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방첩부대 특공대장인 나는 인왕산 기슭에서 자수한 김신조를 데리고 우리에게 협조하도록 회유, 설득해 특공대원 25명을 지휘하여 적의 도주로 차단작전을 신속히 전개했다. 오전 5시 컴컴한 새벽, 우리 특공부대원 25명은 나의 지휘하에 작전에 돌입했다. 오전 6시, 경복고 정문을 통과하여 인왕산으로 향했다. 학교 추녀 밑에 경찰 20여 명이 추위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나는 경복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토가레프 북한 권총 1정을 노획하여 불발
3차 응징보복작전1967년 10월 18일 수요일, 작전지역을 강원도 지역에서 경기도 지역으로 바꿨다. 1,2차 작전으로 강원도 지역은 장애물과 적의 경계가 한층 강화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4:00경, 대원들과 함께 서빙고를 출발했다.16:30경에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으로 들어섰다. 적의 비무장지대 초소에 병력(25여 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17:10경, 아군 28사단 169GP에 도착했다. 나는 유서와 자른 손톱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든 봉투가 반의반으로 접혀 끼여 있는 지갑을 GP 소대장에게 맡겼다. 사물함에 보관
"강력한 응징은 적의 도발을 방지한다." -이진삼- 보복을 결심하다1967년 3월, 김일성은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5·16 이후 남북 간 경제력 차이가 벌어지자 ‘한국 정부를 전복하는 데 역량을 집중,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전군에 하달하였다. 이후 북한은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민심을 교란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북한은 1966년 봄부터 강원과 충청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무장공비들을 57회 침투시켰고, 1967년에는 118회로 2년간 175회로 극에 달했다. 북한
쌍권총 이 대위베트남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내가 다시 맡은 일은 방첩부대 특공대장 임무였다. 베트남 갈 때는 진급의 우선권과 보직의 우선권을 약속했었지만, 정작 내가 돌아왔을 때는 다시 특공대장 임무를 맡도록 사령부에서 내인가를 받아 놨다. 항시 몸에 권총을 차고 다녀야 했고 차에 소총과 수류탄을 싣고 다닐 만큼 특공대장 업무는 위험하고 고생스럽다. 예고도 없이 수시로 작전에 투입돼야 했으니 말이다. 나는 생명을 담보해야만 임무수행을 할 수 있는 특공대장을 다시 맡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동
신원 조사월남에서의 보직은 맹호사단 기동대장 겸 100군수사령부 보안부대장으로 소령 직책이었다. 국내에서의 특공대장 경력을 고려하여 한국과 우방국의 VIP에 대한 경호 임무인 기동대장 직책과 월맹군과 베트콩 등, 적의 정보를 수집하여 맹호사단에 제공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직책이었다. 짧은 기간에 임무를 분석하고 대원들의 특기를 고려하여 3개 팀을 구성하였으며, 3개월 후부터는 맹호부대 정보참모부는 전투 정보를 수집하고, 보안부대는 민관군 특수 정보를 수집하기로 협조하였다.맹호사단은 홍천에서, 100군수사령부는 용평에서 각각 파월을 준
베트남 전쟁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 겪었던 6·25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열강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던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타의에 의한 남북 분단, 그리고 동족 간의 전쟁을 치른 비극이 판에 박은 듯 우리의 처지와 닮았다.베트남 전쟁은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됐다. 말하자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다름없다. 1955년 11월부터 1975년 4월까지 20년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합세하여 베트남공화국(
보병학교 구대장1963년 5월 4일, 동기생 24명과 함께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로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연대장 윤필용 대령은 “육군본부에 연락해 명령을 취소하겠다.”고 나섰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병학교로 가겠다고 했다. 연대장은 나를 떠나보내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그간 고생했다. 열흘간 휴가나 다녀오지.”라고 하면서 서울 가면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정호용, 김복동 등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전두환 소령은 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에 보직되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
할리우드 상윤필용 대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하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 군단 시범이 예정돼 있었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선보일 연극은 였다. 사격, 체력, 각개전투, 총검술 등의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병사 개개인의 훈련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개인훈련 기록 내용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인쇄하여 각 부대별로 실행하도록 했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테스트나 지휘검열을 할 때면 모두 우리 중대로 몰려들었다. 이를 본 연대장 윤필용이 25사단장에게 보고하고 사단장은 또 6군단장에게 보고를 하면서
휴무일(休務日)기독교에서 안식일은 주일(主日)로 삼는 일요일을 말하며 안식교와 유대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삼고 예배를 본다. 안식년은 서양의 선교사와 유대인들이 7년 만에 1년씩 쉬는 해이다.인간이면 누구나 자유를 그리워하지만 24시간 틀에 박힌 생활을 하는 군인들은 특별히 그러하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을 휴무일로 정하고 근무자 외에는 옷을 벗고 모든 장병은 영내에서 썬탠을 하거나 지역 광산에서 구한 자갈을 깔아 먼지 없는 영내 도로를 맨발로 걸으며 발바닥을 단련하고 무좀을 예방했다. 매년 9월에 육체미, 깜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