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청와대 까부수러 왔수다, 1·21사태의 재구성 Ⅱ

 

도주로 차단작전

1월 22일 새벽 4시 30분경, 방첩부대 특공대장인 나는 인왕산 기슭에서 자수한 김신조를 데리고 우리에게 협조하도록 회유, 설득해 특공대원 25명을 지휘하여 적의 도주로 차단작전을 신속히 전개했다. 오전 5시 컴컴한 새벽, 우리 특공부대원 25명은 나의 지휘하에 작전에 돌입했다. 오전 6시, 경복고 정문을 통과하여 인왕산으로 향했다. 학교 추녀 밑에 경찰 20여 명이 추위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나는 경복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토가레프 북한 권총 1정을 노획하여 불발된 권총탄을 제거했다. 그리고 김신조에게 일당들이 도주한 방향으로 안내할 것을 명했다.

맨 처음 간 곳은 간밤에 숙영한 곳이었다. 거기서부터 비봉 승가사 우측 90m 지점에 공비들이 남기고 간 각종 물건이 널브러져 있었다. 모포를 비롯해 실탄, 수류탄, 척탄통 등을 획득했다. 그때 나는 좁은 길을 따라 나무에 빨간 리본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철수를 위한 통로개척을 위해 표시한 것으로 판단됐다. 임무수행 후 청와대 차량을 탈취해 경계망을 뚫고 판문점까지 강행 돌파하여 북으로 넘어오라는 것이었다. 임무수행이 목적이지 이들이 죽든 살든 생명 보장 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공산당의 잔악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단면이었다. 이를 김신조에게 말해주었는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신조는 결국 혼자 남아서 동료들의 주검을 확인해야 했다. 총에 맞아 죽은 동료들의 주검을 확인하는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해보였다.

일당 중 가장 북단까지 올라간 공비는 임진강에서 얼음을 타고 북으로 가다 사살되었다. 아는 퇴로가 많지 않았던 터라 왔던 길을 퇴로로 잡았기 때문이다. 파주군 북노고산에서 가장 많은 11명의 공비가 사살됐다. 반면 우리 군의 희생도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영하 20도의 1월 하순 한파에 빙판인 산비탈을 타고 작전을 함께 수행하던 1사단 12연대의 수색중대장 송강수 대위와 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전사했다. 또한 쓰러져 있던 공비를 수색하다가 목숨을 잃은 군인도 있었다.

사단장, 군단장이 급하게 작전을 종결하기 위한 욕심이 강했다. 무장공비들은 못 먹어서 무거운 총까지 버릴 만큼 지쳐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유리한 작전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이세호 6군단장에게 3번 이상 건의를 했으나 각 부대가 필요 없는 전과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아군 희생을 자초하였다.

1968년 1월 24일 오후 3시, 경기도 파주군 북노고산 남쪽 줄기에서 1사단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50m 전방에서 “저놈 봐라, 저놈” 하는 사이 날아온 적의 총탄에 전사했다. 나와 김신조는 방탄조끼도 입지 않은 채 80m 거리에서 상황을 목격하고 있었다. 오후 3시 밝은 대낮에 급하게 작전을 한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포위된 적에게 노출된 상태에서 급하게 적진으로 달려든 것은 무모한 처사였다. 6·25전쟁을 경험한 고급장교로서 권총을 휴대한 연대장이 현장에 나와 지휘하는 것 또한 무리였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했다. 당시 연대 CP에는 사단장이 와 있었다. 상급지휘관들의 현장방문은 작전에 도움은커녕 연대장을 현장으로 내몬 격이 되었다. 나는 군단장과 사단장은 정해진 위치에서 연대장 CP에 나오지 말고 지휘하기를 건의했다.

남파 되었던 31명의 공비 중에서 살아 돌아간 공비는 단 1명이다. 자수한 김신조를 빼면 29명의 공비가 죽었다. 그들 중에는 1960년에 남파 경험이 있었으며 1966년 송추에서 접선했던 ‘노성집 사건’ 때 북으로 살아 돌아가 영웅이 된 이재형과 우명환이 포함돼 있었다.

우리는 그 29명의 시신을 판문점으로 옮겨 북측에 인도하려 했으나 북측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남파시킨 일이 없다며 끝내 시신 인수를 거절했다. 스물아홉 구의 시신은 경기도 문산 가도 국도변에 묻혀 있다.

얼마 전 TV 출연차 방송국에 들렀다. 나는 그곳에서 오랜만에 배병휴 씨를 만났는데 그가 내게 다가와 김신조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줬다.

“나로 말하자면 이북에서 ‘악’ 소리 날 만큼 훈련받은 손꼽히는 특공대원으로 그야말로 난다 긴다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한에 내려와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이 엄청 내려 무릎까지 찼고 연일 이어지는 한파로 길이 미끄러워 걸어 다니는 데에도 애를 먹었는데, 펄펄 날아다니는 사람이 있더라. 더구나 총알이 빗발치는 곳을 방탄조끼도 입지 않고 다니더라. 남북을 합해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이진삼이다. 엄청 쌓여 있던 눈 속에서 빗발치던 총알을 피해 나와 이진삼 대위가 다리에 힘이 다 빠졌음에도 살아남은 것은 체력도 좋았지만 운도 좋았어요. 나와 이 대위 그리고 대원 3명이 작전 중 눈 속에 갇혔었거든요”

실제로 대개 눈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해서다. 그렇게 많이 쌓여 있는 눈 속에서는 300m만 걸어도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눈 쌓인 산 속에서 조난당하면 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김신조의 말마따나 방탄조끼도 입지 않고 눈길을 걸어 다니며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때문일 것이다. 군인이 된 그 순간부터 내게 있어 삶은 곧 죽음이고 죽음은 곧 삶이었다(生死一如). 삶과 죽음이 하나라 여긴 이상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연연하지 않았다. 군인으로서 명예를 지키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1·21사태를 구실 삼아

작전이 끝난 1968년 2월 초, 나는 윤필용 부대장실을 찾아갔다.

“1·21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단장으로 나가시죠. 명분도 좋고 어차피 사단장을 하셔야 되니까 대통령께 말씀드리십시오.”

나는 윤 장군에게 소신을 전했다. 듣고 있던 윤 장군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좋은 생각이다.”

이후 윤 장군은 경기도 연천군 백의리에 있는 20사단장으로 나갔고, 이듬해는 베트남의 맹호부대 사단장으로 나갔다. 귀국 후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재임 중에 대한민국을 뒤흔든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 이야기는 7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1·21사태로 인해 윤필용 장군은 책임지고 방첩부대장직을 내놓게 됐다. 후임으로 6관구사령관 김재규 소장이 부임했다. 김재규는 곧 부대명을 육군 보안사령부로 개칭했다. 방첩부대장직을 준장이 줄곧 맡아온 터라 소장인 그의 계급에 부대명이 걸맞지 않다고 여긴 까닭이다. 김재규의 부임과 함께 나는 위기 아닌 위기를 맞아야 했다.

윤필용과 김재규 둘의 관계가 물과 기름이었다. 김재규가 부임 즉시 609특공부대로 초도순시를 계획하였다. 윤필용과 친했던 나를 해임시키기 위한 수순이었다. 전국의 많은 직할 및 도 단위 대령급 이상 부대만 초도순시 대상이다. 내가 맡았던 609특공부대는 사령부 직할부대로 대위가 아닌 소령 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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