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침투] 08 반전 Ⅱ
[목숨건 침투] 08 반전 Ⅱ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9.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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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버티고 살아남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15사단에서 13개월이 지날 무렵, 1974년 4월부터 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버티고 살아 있으니까 서울 육군본부의 장군, 대령 선배들이 ‘이진삼을 빨리 서울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진급시켜야 한다’는 소식이 전방까지 들려왔다. 대령이 되어야 하는데 15사단의 부연대장으로는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7사단, 15사단, 27사단과 군단까지 대령 진급 해당자들이 40여 명이었다. 부연대장으로는 대령 진급이 불가능했다. 군단 내에서는 잘 돼야 3명이 대령으로 진급을 한다. 나를 진급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2분기 계획인사로 분류하여 명령을 발부했다. 군단에서 진급 서열 없이 중앙심사대상으로 만들었다. 역사에 없는 급조된 명령이 발부되었다. 그 결과 1975년 10월 1일 대령 진급 예정자로 포함되었다. 15기 동기생 176명 중 10명이 내정된 것이다. 귀양 갔던 내가 목숨도 길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과 하나님 은혜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명월리에서 서울로

“여보, 당신 명령 났어.”

1974년 6월 26일 오후. 혼비백산이 된 아내가 서울에서 5시간이나 되는 먼 거리를 버스로 달려 소식을 가지고 왔다. 그날 아침 일찍, 수경사 작전참모인 박세직(육사 12기) 대령이 집으로 전화했다. “제수씨, 이 중령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로 명령 났다고 빨리 가서 알려주시죠. 이대로라면 5일 후에나 명령서가 사단에 도착하니, 6월을 넘기면 안 됩니다.” 시간이 없다며 서두를 것을 전했다.

관사가 없던 부연대장으로 아내와는 떨어져 지낼 때였다. 아내는 서울에서 혼자 아이 셋을 키우고 있었고, 나는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마현리 산골 집을 얻어 생활했다. 아침을 굶고 출근할 때가 많았다. 아내로부터 들은 소식은 ‘6월 28일 출발하여 6월 29일부로 육군본부에 신고’ 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개는 일주일의 여유를 두고 명령 내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일주일이 걸리면 7월 초가 되니까 중앙심사가 안 된다. 계획적인 발령이었다. 이미 발령이 났으니 문서가 도착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으로는 제때 출근할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인 아내가 전방까지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일단 나는 서둘러 사단으로 달려갔다. 아직 명령이 도착하지 않아 사단 인사참모는 모르고 있었다. 나에 대한 인사발령은 한마디로 작전을 방불케 했다.

“여보 인사운영감, 이진삼 빨리 명령 내시오!”를 종용하던 감찰감 양원섭 소장을 비롯해 9공수여단장 노태우 준장, 1공수여단장 전두환 준장, 작전참모부장 차규헌 소장, 군수참모부장 이범준 소장 등의 많은 장군들의 합동작전으로 명령을 2/4분기로 앞당긴 것이다.

중령 한 사람의 대령 진급을 위해 인사운영감실 통제실장 육사12기 이상규 대령이 빠른 조치를 취했다. 육사 15기로 15사단에서 15개월간, 인생의 또 다른 면을 배울 수 있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었다.

1년 3개월 전, 부사단장 손영길 준장은 붙잡혀 갔지만 나는 살아서 15개월 만에 부연대장 자리를 털고 떠나게 되었다. 내가 육군본부로 발령 받아 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간 측은하게 여겼던 태도와는 달리 참모들은 부러운 듯 환송해 주었다. 일개 중령이 육군본부로 명령 난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발 달린 사단 장교들은 거의 찾아와 축하를 해주었다.

신고를 마치자 박 사단장은 내게 차를 권하면서 “그간 고생 많았소. 육군본부에 가거든 많은 분들께 안부 전하시오.” 했다. 그 말을 듣고 일어서려는데 사단장이 붙잡았다.

“집사람한테 연락해 불고기 준비했으니 저녁 먹고 가시오.”

시간이 촉박해 사양하고 싶었으나 나는 사단 참모들과 함께 불고기 파티에 참석했다.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실오라기 같은 생명줄이 굵은 동아줄이 되어 오히려 튼튼하게 되었습니다. 군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늦은 밤, 6인조 파티밴드의 이별노래 속에 뼈 있는 인사말을 남긴 나는 특별히 내준 차량에 아내와 함께 몸을 실었다. 헌병 호송을 받으며 꼬불꼬불 험한 수피령 고개를 넘자니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시골 방앗간과 대전의 삼진택시 사업 계획은 그날로 접었다. 내 짧은 인생 무엇이 잘못 되었기에 천신만고, 파란곡절을 겪어야 했는지...

 

산처럼

육군본부로 발령 후에 제일 먼저 찾아가 인사를 했던 분은 15사단장이었던 정보참모부 차장 김학순 장군이었다. 김 장군은 “내가 15사단에 계속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1973년 3월, 8사단장 박노영 장군이 15사단장 김학순 장군에게 보낸 편지 내용을 나는 잊지 못하고 많은 장군과 선후배들에게 이야기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편지를 써준 8사단 박노영 장군의 용기와 소신 있는 행동은 훌륭한 장군으로 회자되었다. 그는 이후 수도군단장을 거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 대장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15사단 박완식 장군은 준장으로 옷을 벗었다.

사람은 특히 군인은 무릇 사람을 대할 때 저울처럼 무게에 따라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선 품위가 떨어진다. 자신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이익이 큰 쪽으로만 움직이게 되면 저울은 고장이 난다. 산처럼 늘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육군본부

말단 참모장교 생활은 지휘관과 달리 책임도 없고 맡은 업무에 충실하면 되는 편안한 자리였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사무실 청소와 정돈을 몸소 했다. 이전까지는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8월이 지나도록 대령 진급심사는 이루어지지 않아 해당자들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운명에 맡기고 계획된 하계휴양이나 다녀오겠다며 처장 신위영 장군에게 보고하고 10일간의 휴가를 떠났다.

고향인 부여 은산에 있는 아버님 묘소를 찾아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옛 학교 동문들과 밤늦게까지 지냈다. 유성 군인호텔로 찾아온 친구들과 아침식사 후 이발을 했다.

3개월 전, 강창성 소장은 보안사령관에서 3관구사령관으로 전보되어 있었다. 누가 보고를 했는지 나를 만나보겠다고 부관을 이발소로 보내왔다. “사령관님께서 이 중령님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는 말을 전했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시골 산소에 들러야 하기 때문에 시간 없다고 말씀 드려.”

내 말에 강 장군의 부관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돌아갔다.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이 도리인 줄 알지만 같은 동기인 윤필용 장군에 대한 치욕적인 고문과 선배들의 옷을 벗기고 나를 전방으로 내친 일을 생각하니 만날 수가 없었다.

내 말에 머리를 손질하던 이발사가 놀라는 눈치였다. 관구사령관이 오라고 사람까지 보냈는데 일개 중령이 안 간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0분쯤 지났을까, 또다시 부관이 찾아왔다. 공관은 걸어서 3분 거리에 있었다.

“사령관님은 오늘이 일요일이라 고아원 방문을 하셔야 되는데 가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 입장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중령님?”

“그래?”

부관 안내로 공관으로 막 들어서자 2층에 있던 사령관이 1층으로 내려와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내게 이런저런 말로 지난날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해 변명을 했다. 그런 그를 향해 나는 말문을 열었다.

“제가 1970년 8사단 보안 부대장 시절, 5사단장님 하셨죠. 그때 뭐라 하셨습니까. 저를 불러 앞으로 같이 근무하자고 하셨지요. 육군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는 보안사령관으로 오셔서 저를 오라고 하여 표창장도 주시고 교육비도 주셨고요. 간첩사살 훈장을 못 주었다고 안타까워 하셨고, 대대장 끝내고 보안사로 다시 왔으면 좋겠다고 대공처장 김교련 장군에게 말씀 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15사단 부연대장으로 쫓겨 가는 바람에 아무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저는 이제 제대를 할 테니까 앞으로 우리 후배들은 잘 봐주십시오.”

나는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던 말을 뼈 있게 꺼내놓았다.

“이 중령이 작전참모부에 와 있는 거 알아. 이번에 진급해야지. 나희필 장군이 작전참모부장이야. 내가 나 장군한테 이 중령 진급 부탁하겠다.”

“아닙니다, 사령관님. 말씀 드리지 마십시오.”

나희필 장군이 내가 어떤 처지인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대고 얘기한들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다. 해당자가 52명이었다. 강창성 사령관이 대령 진급과 관련해 나희필 장군에게 내 얘기를 해놨던 것은 사실이다. 작전참모부 진급 예정자 2명 중 한 명으로 나희필 참모부장에게 인사차 들렀을 때, 나 장군은 강창성 3관구사령관으로부터 나에 대한 부탁을 받았음을 전해주었다. 나는 강 사령관에게 윤필용 사건과 연관된 얘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강 사령관 또한 그 일에 있어서 충분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좌천당한 강 장군 앞에서 더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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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10-03 13:35:18
끗꿋이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가지구 일하는 군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