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3차 응징보복작전

1967년 10월 18일 수요일, 작전지역을 강원도 지역에서 경기도 지역으로 바꿨다. 1,2차 작전으로 강원도 지역은 장애물과 적의 경계가 한층 강화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4:00경, 대원들과 함께 서빙고를 출발했다.

16:30경에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으로 들어섰다. 적의 비무장지대 초소에 병력(25여 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작전이었다.

17:10경, 아군 28사단 169GP에 도착했다. 나는 유서와 자른 손톱 그리고 사진 한 장이 든 봉투가 반의반으로 접혀 끼여 있는 지갑을 GP 소대장에게 맡겼다. 사물함에 보관해줄 것을 부탁했다. 임진강이 동서로 흐르고 북서 방향으로 직선거리 300m 내에 위치한 적의 689GP. 육안으로도 목표가 보였다. 베티고지 바로 뒤편에 있었다. 베티고지는 6·25전쟁 막바지, 휴전협상 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피아간 사투를 벌였던 곳이다. 휴전을 얼마 남기지 않은 1953년 7월 15일, 중공군은 야음을 틈타 서부전선 일대에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그 결과 김만술 소대는 그곳에서 중공군 2개 대대의 공격을 받았다. 아군 35명의 1개 소대와 적군 700여 명의 2개 대대, 상대가 안 될 전력이었지만 아군 포병의 진내 사격 등 모든 화력을 동원해 저항했으며 탄약이 고갈된 뒤에는 야음을 틈타 적에게 접근, 호루라기에 맞춰 백병전을 전개했다. 13시간 동안의 피비린내 나는 사투 끝에 아군은 23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 적군은 314명 전사에 450여 명이 부상당했다. 적군은 철수하기에 급급했다. 당시에 베티고지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았더라면 현재의 휴전선으로부터 2㎞ 후방까지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어 임진강 이남으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 나는 대원들에게 김만술 소위의 용맹심과 충성심을 설명한 뒤, 베티고지를 바라보며 전의를 다졌다.

18:40경, GP 소대장과 소대원 넷의 도움으로 군사분계선까지 장비를 운반.

19:00경에 군사분계선상인 도하 예정 지점에 도착 약 20분간 전방을 감시했다.

19:20경 도강, CT 219 223 대안에 도착했다. 야전삽으로 땅을 판 뒤 도하 장비를 묻고 포복으로 갈대밭까지 접근하여 전방을 관측한 결과, 우리들이 있는 위치에서 60여 미터 전방에 적의 경계초소가 보였다. 나는 김의행에게 적의 병력을 확인할 것을 지시, 약 20m를 전진시켰던바 특별한 반응이 없어 적 경계병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계속 개울을 따라 전진하다 2명의 경계병을 발견했다. 나는 2명의 초병을 처치하고 적의 GP를 습격할 것인지 아니면 기회를 포착, 우회하여 GP를 습격할 것인가를 판단해야 했다. 산길 100m는 상당한 거리다. 총으로 초병들을 처치할 경우는 GP 내 적병들에게 기도(企圖)가 폭로된다. 무성무기로 처치한다 하더라도 저항에 부딪히면 그 역시 노출될 수 있다는 판단하에 기다리기로 했다. 초병들이 자정 넘어 새벽 사이에 졸거나 잠드는 사이 백태산과 김의행에게 교통호로 우회해 적을 처치할 것을 지시했다. 처치한 후에 통신선을 절단할 것도 지시했다. 백태산이 교통호 벽에 붙어 적 1명을 단도로 처치하는 사이, 김의행은 초소 안의 초병을 끌어안고 뒹굴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백태산의 날카로운 칼날이 적의 목을 찔러 피바다가 되었다. 백태산이 통신선을 자른 뒤,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02:00시경, 후방 소로를 따라 적 689GP에 기습적으로 접근, 내무반 문을 열고 수류탄 투척(8발)과 기관단총 사격으로 적 689GP를 완전 파괴하고 적 20여 명을 사살했다. 폭발 소리와 화염으로 낮같이 주위가 환하게 비쳤다. “탕” “탕” “탕” 나는 세 발의 권총 사격으로 철수 신호를 보냈다.

02:30시경, 예정된 집결지에 도착 확인한 결과 김의행이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수류탄을 투척하고 계획된 우측으로 피하지 않고 좌측 방향으로 피해, 길을 잃어 적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것으로 판단했다. 약 30분 후 자동차 소리와 적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 왔다.

06:10시경 군사분계선상 도착, 아침 안개를 이용하여 임진강을 도하했다.

07:00시경, 침투했던 통로를 따라 아군 169GP로 복귀했다. 나는 GP 소대장 침상에 엎드린 채 김의행을 생각하며 죄책감에 사로 잡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김의행의 죽음, 초소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죽음 앞에선 눈물이 먼저였다. 더구나 같은 목적으로 같은 훈련을 하는 동안 피어난 전우애와 우리들의 관계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의심했던 나 자신을 후회하였다. 죽지 않고 꼭 살아 대한민국에 충성하며 살자고 다짐했던 전우의 죽음이 너무나 괴롭고 슬펐다.

“대장님, 제가 죽었어도 그리 우시겠죠!”

김의행의 죽음에 오열했던 나를 향해 백태산과 이기철이 던진 말이다. 나는 약속대로 윤필용 사령관에게 건의하여 그들을 불기소 처분하고 정착금도 지원해 주고 직업도 알선해 주었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

1967년 10월 20일, 부대장 윤 장군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합석한 김교련 대령에게 대통령께 올릴 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1967년 10월 24일 화요일 오전 11시, 나는 방첩부대장 윤필용 장군과 함께 김교련 대령이 작성한 보고서를 지참, 청와대를 찾았다.

“각하, 육사 15기생 이진삼입니다. 제가 연대장으로 있던 부대에서 중위로 중대장을 했습니다. 그것도 선봉중대장이었습니다.”

“이미 보고 받아 잘 알고 있네.”

박 대통령은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러면서 탁자 위에 놓인 보고서의 첫 장을 뒤적이며 “고향이 부여…….” 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네, 충청남도 부여입니다. 나이는 서른한 살입니다.”

“결혼했구먼. 딸린 식구가…….”

대통령의 말이 끝나기 전, 윤필용 장군이 끼어들었다.

“이 대위가 곧 셋째를 볼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 대통령은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수고했어. 작전도 작전이지만 공비들을 포섭해 역이용한 발상이 좋았어. 이제 그만 해, 명령이다. 베트남은 다녀왔나?”

“예, 맹호부대 기동대장으로 다녀왔습니다.”

내 말에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테이블 서랍에서 봉황이 그려진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들었다. 빳빳한 500원권 지폐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뒷면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혀 있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두 손으로 봉투를 받은 나의 정복 상의 견장을 손으로 다독이던 박 대통령은 되뇌듯 “앞으로도 군 생활 잘 해서 장군 돼야지” 하고는 윤 장군에게 “특별한 관심 갖고 이 대위 잘 돌봐줘요”라며 당부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윤 장군과 내가 동시에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내 키가 작아 보였는지 박 대통령이 물었다.

“이 대위, 자네 키가 몇인가?”

“네, 165cm입니다.”

“그래, 나보단 1cm 크군.”

“몸무게는?”

“네, 63kg입니다.”

“날쌔 보여.”

박 대통령과의 대화는 짧지만 강렬했다.

“몇 시인가?”

박 대통령은 손가락으로 윤 장군의 왼쪽 팔목의 시계를 가리켰다.

“예, 11시 40분입니다.”

“점심시간인데 우리 점심이나 같이 할까?”

“각하, 저희끼리 나가서 하겠습니다.”

윤 장군과 나는 대기시켜 놓은 지프차를 타고 통인동 방첩부대장실로 향했다. 사령관실 접견실에서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윤 장군에게 전투부대로 전출시켜 줄 것을 부탁했다.

“내가 부대장 하는 동안엔 안 돼”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윤 장군에게 내 소신을 밝혔다. 보병부대로 보내주기를 바랐다. 소령, 중령, 대령이 되어 대대장, 연대장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윤필용 장군이 아니었다면 방첩부대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방첩부대로 전입시키라는 지시만 하지 않았어도 나는 평범한 군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내가 앞으로 사단장 나가면 그때 함께 가자” 했으나 더는 방첩부대에 근무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응징보복작전은 물론 국내 대공비, 대간첩 작전을 통해 희생된 전우들에 대한 자책감에 괴로웠던 사건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꿈에 자주 나타나 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전투에 관한 영화나 TV, 드라마가 나오면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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