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을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강력한 응징은 적의 도발을 방지한다." -이진삼-

 

보복을 결심하다

1967년 3월, 김일성은 제4기 15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5·16 이후 남북 간 경제력 차이가 벌어지자 ‘한국 정부를 전복하는 데 역량을 집중,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전군에 하달하였다. 이후 북한은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주요시설을 파괴하고 민심을 교란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북한은 1966년 봄부터 강원과 충청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무장공비들을 57회 침투시켰고, 1967년에는 118회로 2년간 175회로 극에 달했다. 북한은 한국과 미국이 베트남전에 전력투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미국이 남한에 지원 못할 것을 노리고 남한에 강력한 국지도발을 감행해 온 것이다. 즉, 북한군은 한국군이 대북보복작전을 전쟁 억지 차원에서 하지 않는다는 약점을 노렸던 것이다. 휴전선 인근 아군과 미군의 GP가 수시로 습격당했고, 중동부 전선에선 공비 무리가 우리의 전방 사단으로 침투, 양민을 학살하고 태백산맥을 타고 북한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21사단 부연대장 김두표 중령과 두 딸 그리고 그의 처형을 살해하는 등 공비들은 군인과 일반 국민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피 끓는 젊은 군인으로서 더는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목울대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길로 방첩부대장 윤필용 장군을 찾아갔다. ‘기필코 응징하고 말리라’는 다짐이 끊임없이 마음을 강타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부대장님.”

“뭐야? 이 사람, 어딜 가겠다고? 큰일 낼 사람일세. 안 돼.”

윤 장군은 내 청을 단박에 거절했다.

“당신은 나중에 중요한 지휘관이 될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지금 뭐를 한다고?”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방을 나온 나는 구체적인 실행계획에 착수했다. 마음보다 빠르게 몸이 어딘가로 향했다.

내가 대북 응징보복작전을 결심하게 된 것은 우리 군의 존재 목적은 물론 군의 자존심 문제였다. 북한은 6·25남침 이전, 38선상에서 수시로 무력충돌을 일으키곤 했다. 국군의 경비 상황과 군사력을 시험했던 것이다. 도발이 680회에 달했다. 1949년 4월 25일에는 북한군 6사단이 38선 남방 100m 지점 비둘기(송악산) 고지를 기습했다. 아군은 같은 해 5월 4일 진지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했으나 10개의 토치카로 요새화된 진지를 탈취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1사단장 김석원 장군의 계획하에 11연대 서부덕 소위 이하 아홉 명의 특무상사(김종해, 박창근, 박평서, 양용순, 오제룡, 윤승원, 윤옥춘, 이희복, 황금재)들은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를 향해 돌입,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했다. 그 길로 내가 간 곳은 서빙고분실이다. 그곳에는 북한특수부대 출신들로 검거 또는 자수한 공비들이 수용돼 있었다.

 

무장공비 중에서

공비 아홉 명 중 면밀한 심사 끝에 백태산(26세), 박상혁(19세), 김의행(26세), 이기철(27세) 네 명을 선발했다.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은 대개 열일곱 살에 입대한다. 기초훈련을 마치면 ‘전사’로 시작하는 일반 병사와는 달리 4계급을 뛰어넘어 ‘중사’로 군 생활을 시작한다. 당연히 출신성분이 좋아야 북한 특수부대원으로 자격이 주어지기에 그들 4명 모두는 그들이 말하는 당성이 강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인한 자들이었다.

내가 한국군을 데리고 북으로 넘어가 작전수행 중 죽게 될 경우를 생각해 봤다. 당시의 우리 군은 북쪽으로의 공격이나 침투를 허용치 않았다. 내가 희생되는 것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죽을 테니 문제가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군이 아닌 전향 공비를 선택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군보단 그들이 북한을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욱 고민스러운 것은 그렇다고 대원들끼리만 작전을 수행하게 할 수 없어서였다. 대원들만 보내놓고 지휘자가 없으면 각종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작전지휘를 위해서라도 나는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만의 하나 그들이 나를 배신해서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많은 시간을 함께 훈련하면서 작전수행 준비를 차곡차곡 했다. 권총을 빼앗기면 자살할 생각으로 대원들 몰래 권총 하나를 더 준비했다. 그러니까 권총은 일단 유사시에는 신호용이고, 위급 시에는 자결용이었다. 또 한 가지 나만 알고 있는 방법은 적지 않겠다. 실행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다.

1967년 7월 초, 서울 종로구 통인동 방첩부대 부대장실, 내가 부대장실에 들어섰을 땐 윤 장군이 마침 1군사령관 서종철 대장과 통화 중이었다. 방첩처장 김교련 대령도 함께했다. 통화가 길어졌다.

“네, 네, 그렇습니다.”

윤 장군의 토막말만으로는 전체적인 통화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길게 날숨을 내쉬는 등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미루어 뭔가 잘 안 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연일 도발을 일삼는 무장공비들에 대해 내가 윤필용 장군에게 제안한 보복대책에 관한 것이었는바, 서종철 장군이 그중에서 구체적 실행안에 관해 “연구해 봅시다.”라는 말을 한 것은 결국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로 들렸다. 윤 장군이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나는 한 발짝 다가가 말했다.

“제가 응징작전 하겠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대위 안 돼. 우리 부대는 잡는 부대지, 침투 부대가 아니다.”

나의 끈질기면서도 진지함에 윤 장군은 한동안 깊은 침묵으로 대신했다. 한 숨, 두 숨, 세 숨, 그가 마침내 침묵을 깼다.

“하긴 누가 지 목숨 걸고 자원하겠어. 군사기밀로 묶어둔다 해도 보안상 문제도 많고, 설령 살아 돌아왔다 해도 언젠간 나발불고 다닐 테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너무 위험해. 살아온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고. 전향을 했다 해도 걔네들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턱밑에 총구멍을 들이댄 공비였다고. 만의 하나 뒤돌아서 쏘고 달아나면…….”

나로선 윤 장군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그렇다고 응징하지 않고 당하고만 있으면 놈들의 도발은 쉴 새 없이 이어질 게 뻔했다. 우리가 한두 번 당하고 속았는가. 응징만이 도발을 방지할 수 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것처럼.

응징보복작전을 위해 전향 공비 중 네 명을 선발해 놓고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나와 그들 간의 신뢰를 쌓는 일이었다. 우리 일행이 할 일은 북한 놈들과 그들의 일당을 깨부수는 일이다. 대원들 모두는 북으로부터 속은 거였다. 어차피 돌아갈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폭격기 조종사들처럼 말이 좋아 가미카제 특공대지 죽으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공비들 또한 북한으로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임무를 받았던 것이다. 당시 한국은 그들의 생포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공개되면 북에 있는 그들의 가족 모두가 숙청될 것을 우려해서다. 어쨌든 나는 정보사령부 모 처장을 만나 훈련복 다섯 벌과 각종 장비를, 제1공수특전부대에서 훈련복 다섯 벌과 모래주머니 열 개를 구했다. 곧이어 대원들을 이끌고 우이동 계곡으로 갔다.

구릉, 능선, 개활지 등 장차 전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곳과 흡사한 지형에서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지형에 따라 전투 방법이 달라져야 했다. 그렇다고 우이동 계곡이 작전지와 흡사한 것은 아니지만 마땅한 훈련지가 서울 근교에는 없었다. 우이동 계곡은 삼각산(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 만들어낸 곳으로 골짜기의 골이 매우 깊다. 고원 형태의 완만한 능선에서부터 깎아지른 듯한 절벽까지 그야말로 여러 형태의 지형을 갖춘 곳이다. 특히 산악이 중첩되어 있는 한반도의 지형상 기갑부대의 기동은 어렵다. 보병에 의한 고지전투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다. 6·25참전 초기, 미군이 고지를 오르내리는 데 익숙하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대에서는 보통 말을 물가로 끌고 가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더러는 물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 멀리 함께 가야 할 여정이면 더욱 그렇다. 네 명 모두 정예 특수부대 출신으로 무술과 사격술이 뛰어났으나, 전투라는 것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협동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단체훈련을 비롯한 적진에서의 기도비닉(企圖秘匿 하고자 하는 일을 적이 눈치 못 채게 은밀히 움직임), 목표물 기습 등 세트 플레이형 각종 훈련을 필요로 했다. 아무리 개인기가 뛰어나도 다른 대원들의 호응이 없으면 실패하고 같이 죽게 된다.

대원들은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생명을 걸고 사살하고 잡아들였던 공비였다. 그들 또한 나의 심장에 총을 겨누었다. 나로선 훈련 과정을 통해 그들 네 명의 전향 의지를 재확인해야 했다.

승리를 위해선 각종 상황에 맞는 지옥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그중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그들의 진정한 실력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는 느닷없이 그들 네 명을 향해 두 주먹, 두 발을 뻗어 대련자세를 취했다. 한꺼번에 덤비라는 도발이었다. 제일 먼저 백태산이 앞차기를 하며 달려들었다. 순간 나는 옆으로 비켜나면서 짧게 끊어 발을 날렸다. 그런 다음 뒤돌아 차기와 올려 차기로 그를 제압했다.

다음은 이기철이 달려들었다. 피차간에 온갖 기술이 다 동원됐다. 돌려 차기, 앞차기, 뒤차기, 회축, 무릎 대 돌리기, 발등 찍기 등. 밀고 밀리는 가운데 결국 승부는 내가 날린 밭다리후리기 한 방이었다. 백태산과 이기철에게 썼던 기술은 내가 만들어낸 특공무술, 실전 격투기였다. 태권도를 비롯하여 유도와 합기도 등 온갖 무술을 합쳐놓은 기술이다.

“적보다 전투 기술이 모자라면 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오로지 훈련만이 승리를 보장할 뿐이다. 땀을 많이 흘리면 흘릴수록 피는 적게 흘리는 법이다. 훈련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적응할 수 있게 준비해야 했다. 나는 우선 8㎏ 분량의 모래주머니를 양쪽 발목에 차도록 했다. 이는 곧 우리가 휴대할 총, 실탄 등 개인장비의 무게와 비슷했다. 삼복더위에 기습적으로 장맛비가 이어졌다. 우리는 날씨를 아랑곳하지 않고, 빗물에 젖은 모래주머니와 전투화로 질퍽대는 산비탈의 악조건 속에서 산꼭대기까지 같은 길을 수없이 오르내렸다. 입에서 단내가 날 만큼 고단한 훈련이었음에도 그들은 훈련하는 이유나 목적을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하루를 정리하며 스스로에게 따지듯 물었다. ‘녀석들, 혹시 딴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나한테 져준 건 아닐까?’

그들 모두 주먹 단련으로 벽돌 격파는 나보다 나았으나 지칠 줄 모르는 동작 지속 능력은 나에게 미치지 못했다. 나는 31세, 대원들의 나이는 19세~2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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