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침투] 03 베트남 전선을 가다 Ⅵ
[목숨건 침투] 03 베트남 전선을 가다 Ⅵ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5.27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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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쌍권총 이 대위

베트남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내가 다시 맡은 일은 방첩부대 특공대장 임무였다. 베트남 갈 때는 진급의 우선권과 보직의 우선권을 약속했었지만, 정작 내가 돌아왔을 때는 다시 특공대장 임무를 맡도록 사령부에서 내인가를 받아 놨다. 항시 몸에 권총을 차고 다녀야 했고 차에 소총과 수류탄을 싣고 다닐 만큼 특공대장 업무는 위험하고 고생스럽다. 예고도 없이 수시로 작전에 투입돼야 했으니 말이다. 나는 생명을 담보해야만 임무수행을 할 수 있는 특공대장을 다시 맡아야 하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동아방송 조동화 과장 테러사건 누명, 말도 안 되는 일을 덮어씌우는 그들을 위해 목숨 걸고 나라를 지키면서 배신감까지 가져 보았다.

“맡을 사람이 없어. 어떻게 된 게 4개월을 못 버텨. 부하들이 싫어하고 불평이 많아.”

내가 다시 특공대장을 맡기 전까지는 2명의 소령이 그 업무를 맡았다. 딱히 어떤 시스템이 구체적으로 갖춰져 있던 때가 아닌 터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업무 수행에 있어 애를 먹었다고 했다. 목숨 내놓고 전국 산야를 헤매는 임무수행을 누가 좋아 했겠는가. 더구나 육체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대원들의 통솔이 쉽지 않아 지휘관의 통솔력이 관건이다. 체력이 강해 대원들을 압도해야 함은 물론 특수임무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부하들이 따른다. 무엇보다 대원들의 사기가 통솔의 기본이다.

한번은 장충체육관에서 해군과 배구시합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우리 부대 선수들이 나약한 문관들의 응원을 받으며 코트에 섰다. 동시에 해병대의 헌병들이 우리의 응원단을 삥 둘러쌌다. 응원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계급장이 없는 위장복을 입고 지켜보던 나는 불시에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십오륙 명의 대원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헌병들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바람에 콘크리트 바닥에 깔려 있던 나무상자가 칼날처럼 날아와 헌병의 헬멧을 날려버렸다. 응원 왔던 관중들이 놀라 실외로 나갔다. 텔레비전 화면에 그 광경이 잡혔다. 보고 있던 서울 방첩부대장 김진구 대령과 권익현 중령이 그만두라고 소리를 쳤으나 대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급이 문제가 아니었다. 내 명령이 있기 전에는 그만두지 않았다. 내가 나서서 수신호를 보내고 그만두라는 한 마디에 대원들이 멈췄다. 이를 보고 놀라 자빠진 이들이 또 있었다. 서울의 일류 주먹들이었다. 장충체육관 광경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전파를 탄 것이다. 이후 어디를 가든 내로라하는 주먹들이 슬슬 나를 피해 다녔다. 당시는 일명 ‘형편없는 놈’들이 있다고 하면 무조건 잡아넣던 시대였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 ‘형편없는 주먹’들이 말썽을 피운다는 첩보가 뜨면 당장 그들을 잡아 경찰서에 분산 유치했다. 한 곳에 유치하면 소요를 일으킬 수 있어 여러 경찰서로 분산시켰다. 내 명령 없인 함부로 방면하지도 않았다. 놔주라면 놔주고, 법원 송치하라면 송치했다.

“이진삼 대위는 절대 경우 없는 짓 안 해.”

윤필용 장군의 그 말 한마디가 내 임무수행에 목숨을 걸도록 만들었다. 나는 정의감 있는 처신을 독려했다.

당시 청량리역 오색등불 588번지에서는 매춘부들이 장병들을 잡아끌었다. 시비를 걸고 폭력배들이 관여하고 헌병대에 폭력 신고하여 연행토록 했다. 바쁘게 버스를 타야 할 휴가 귀대 장병들이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주야 없이 수십 년간 장병들을 괴롭혔던 포주와 식당 업주들에게 대대적인 숙정 작전을 벌였으며 수방사 헌병 10중대장 노석호 대위에게 지시, 일절 장병 연행을 중지시켰다. 청량리경찰서에도 비상이 걸렸다. 3일간 진삼(鎭三) 작전으로 588은 헌병, 경찰과 보안부대 작전에 호황 지역에서 불황 지역이 되었다. 반면 휴가 장병들은 즐거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솔선하자. 무엇이든 국가가 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우리는 명시된 임무 외에 추정된 임무도 찾아서 해야 한다.

 

좋은 장비는 일하는 사람에게

1967년 전국 단위부대장 회의가 있었다. 나는 대위였지만 소령직위의 사령부 직할부대장인 609특공대장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회의 후에 중식을 마치고 윤필용 사령관을 비롯하여 사령부 참모들과 예하부대 지휘관들이 식당에서 나오자 군수처장인 장영근 대령이 작은 운동장에 세워둔 신형 윌리스(Willys) 지프(Jeep)차를 지시봉으로 가리키며 “사령관님용으로 차량을 꾸며보았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가장 가볍고 튼튼한 회색 알루미늄 커버를 씌우고 최고 성능의 사이렌, 무전기, 라디오, 에어컨, 선풍기, 흡연 시설과 같은 내부 장식과 비상 라이트, 무전기, 안테나 등을 장착한 서울 자가용 8807 차량이었다. 당시 가격으로 190만 원 상당의 차량으로 웬만한 주택 3채 가격이라고 보고했다. 사령관은 뒤편에 서 있던 나를 찾으며 말했다.

“이 대위 어디 있어? 앞으로 나와서 시동 한번 걸어봐! 간첩을 잡기 위해서는 험한 지형에서 기동과 통신이 원활해야 한다. 특공대장 이 대위가 타라. 나는 서울에서 출퇴근할 때 이용할 뿐이고 현재 타는 차량이면 충분하다. 활동부처 요원들이 최우선이다.”

“저는 1/4톤 군용 차량과 소형 승용차 포니도 있습니다. 저는 안타겠습니다. 사령관님 타시지요.”

사령부 수송관이 1시간 후 과일 3박스를 싣고 609특공대를 방문했다. 수송관은 “사령관님 명령입니다.”라면서 공구와 차량과 관련된 일체의 서류를 나의 운전병에게 인계하고 돌아갔다. 부대장의 명령에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부담이 되어 사령부 회의 등 평시에는 운행을 삼갔다. 사령관이 준 차량은 작전 임무수행 시에 무전차량으로 67년 대북 응징보복작전과 68년 1월 21일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 간첩 공비 소탕작전에 최대 활용, 성과를 거두었다.

사령부 간부들은 윤필용 장군을 정말 멋지다고 평가했으며, 이 일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25사단 72연대장과 11중대장과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대위가 있었더라면

“이 특공대장님(대위)이 안 계셔서 경찰에 접선 공작을 시켰더니만 우리 측은 희생이 컸고, 두 놈은 넘어가 영웅이 됐지 뭡니까!”

베트남에서 귀국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정보부(지금의 국정원) 직원이 나를 찾아와 대뜸 했던 말이다. 내가 베트남에서 입국 전인 1966년 7월,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 3인조 무장간첩이 출현했던 이른바 ‘노성집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고정간첩과 접선, 서울 시내로 잠입해 박정희 대통령이 타고 가는 승용차에 수류탄을 투척해 암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고정간첩은 이미 체포돼 전향하여 대북 역용공작에 적극 협조했다. 계속해서 북으로 암호통신을 보내며 남한에서 그가 부여받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고했고, 이를 알지 못한 3인조 무장간첩이 그와의 접선을 위해 송추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를 서울시경의 대공 요원들이 잠복해 있다가 덮치는 과정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서울 경찰 대공 요원 두 명이 전사했고, 무장간첩 한 명이 생포되었으며, 두 명은 몸에 심한 총상을 입은 채 도주해 북으로 돌아갔다. 생포된 사람은 조장이었던 노성집이고, 도주한 자들은 조원 이재형과 우명환이다. 특히 이재형은 도주하다가 복부에 총을 맞아서 내장이 쏟아졌음에도 쏟아진 내장을 쓸어 담고 임진강을 건넜다. 우명환 역시 시경 대공 요원이 휘두른 권총 손잡이에 머리를 다치고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나 휴전선을 넘어 북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은 북으로 돌아간 후, ‘공화국 전투 영웅’의 칭호와 함께 각각 육군 대좌와 상좌 계급을 받았다. 2년 후, 그들은 평양시 근교 상원군 공포리에 악명 높은 124군부대를 창설하고 후배를 양성하는 등 1·21사태의 주범이 된 인물이다.

방첩부대 생활 4년이 흘렀다.(3년 특공부대장, 1년 베트남) 군인은 야전에서 경험을 쌓는 것이 원칙이다. 나는 야전으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야 연대참모를 하고 대대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봐, 거기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어. 연대참모 하려면 소령은 달아야 하는데 같이 더 있어 보자. 내가 사단장으로 갈 때 같이 가면 될 거 아냐.”

윤필용 장군의 그 말과 함께 시작된 나의 군대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때 내가 했던 일들은 남북의 극단적인 대결구도 속에서 반세기 가까이 정보의 통제로 어떤 것은 세월에 묻혀 사라졌고 어떤 것은 소문의 형태로 떠돌았다. 그러던 것이 2008년 10월 8일, 국회국방위원의 기무사령부에 대한 비공개 국정감사 중, 기무사령관 김종태(전 국회의원) 중장이 국방위원들에게 해제된 비밀 문건 9건을 공표했다. 나와 관련된 소문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MBC TV 일요일 저녁 9시 뉴스로 최초 방송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이진삼 의원 대공 관련 작전’

다음 4장은 그중 하나인 ‘대북 응징보복작전’으로 나의 북파 사실이 수록된 보고서다. 내가 북한군복에 북한총을 들고 북한강과 임진강을 건너 대북 응징보복작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분단된 조국의 뼈아픈 역사에 대한 리포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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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05-27 16:53:38
올바른 신념이 있는 사람이 용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