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할리우드 상

윤필용 대령이 연대장으로 부임하고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 군단 시범이 예정돼 있었다.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선보일 연극은 <개인훈련 기록카드>였다. 사격, 체력, 각개전투, 총검술 등의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병사 개개인의 훈련기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개인훈련 기록 내용이었다. 육군본부에서 인쇄하여 각 부대별로 실행하도록 했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테스트나 지휘검열을 할 때면 모두 우리 중대로 몰려들었다. 이를 본 연대장 윤필용이 25사단장에게 보고하고 사단장은 또 6군단장에게 보고를 하면서 내가 맡고 있는 11중대로 하여금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이후로 전 군단 내의 중대장급 이상은 우리 중대에서 시범을 보도록 지시가 내려졌다. 다시 소대장급 이상으로 군단장의 지시가 하달되면서 우리 중대의 시범을 3일 동안 세 번이나 실시하였다.

시범 전 날, 연습을 하고 있는데 연대장 윤필용 대령이 시범장을 찾아왔다. 한참을 지켜보고는 내게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런데 나는 그의 참견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가 그러든 말든 대꾸하지 않고 자리를 피해 연대에서 보내준 지프차에 올라탔다. 다음 날 오전에 있을 시범 내용을 수정하기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떠나버렸다. 속으론 내가 엄청 괘씸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의외였다. 아랫사람의 주장이 옳을 때는 깨끗이 인정하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분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았지만, 그날 내 행동에 무덤덤한 표정을 보였던 것에는 지금 생각해도 죄송한 마음이 든다.

시범 첫날, 나는 군단 내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 700여 명 앞에서 <개인훈련 기록카드> 시범을 보였다.

“우리가 전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선 중대장으로서 갖춰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사격, 체력, 각개전투, 총검술 등 모든 전투 행동 지침에 있는 과목을 체계적으로 병사들에게 훈련시켜야 합니다.”를 시작으로 “저는 이렇게 해서 전투력을 증강했습니다. 적어도 이등병으로 들어와 일등병이 되고 상병이 되기 이전에 거의 ‘우’를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전적으로 초급장교와 하사관이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설명을 하면 지켜보던 연대장 중의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하도록 돼 있었다. 연대장 한 명이 질문을 했다. 내가 대답했다.

“연대장님, 여기 군단장님도 계시고 사단장님도 계신데 무슨 질문을 하십니까. 가만히 계시면 설명을 해드릴 텐데 말입니다. 질문을 하시면 연대장님만 모르는 것처럼 되지 않습니까?”

나는 느닷없이 시나리오에 없던 얘기를 해버렸다. 그 말에 군단장을 비롯한 사단장들과 모든 장병들이 박장대소하였다. 군단장 김계원 장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봐 사단장, 저 11중대장 아까 뭐라고 했지?” 하고는 내 계급장을 보더니 “어이, 저 이 중위, 할리우드 상 줘”라며 사단장에게 지시하였다. 거칠 것 없고 소신 있는 내 언행은 어디서든 튀었다. 하사관들 군기 교육으로 유명해지고 모범 중대장으로 유명한 데다, 군단장까지 나서서 할리우드 상을 주라고 하니까 군단 내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다고 여겼다. 생도 시절엔 원칙과 이상을 추구했고, 현지에선 그 원칙과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솔선수범에 나섰을 뿐이었다. 그런 평범한 나를 모두가 칭찬하였다. 며칠 후, 나는 군단장 공로표창을 사단을 통해 받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72연대 각 중대는 교대로 사단을 지원하는 탄약 중대 경비 임무를 부여받았다. 경비 중대는 경비 책임이 있고 탄약 보급 관리는 탄약 중대가 맡았다. 경비를 서기 위해선 산의 나무를 깎아내야 했다. 나무와 숲이 무성하면 시계(視界)와 사계(射界)를 가려 경비를 설 수 없어 사계 청소를 해야 한다. 사계 청소로 베어낸 나무들이 부대 한구석에 제법 쌓이기 시작할 무렵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베어낸 나무들을 그렇게 방치할 게 아니라 장병들을 위해 의미 있게 쓸 데가 없을까 생각했다. 부대 근처에서 살림을 하고 있는 나이 많은 하사관들이 떠올랐다. 그들 가족 숙소에 나누어 주어 땔감으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 물론 병사들을 위해서도 요긴하게 사용했다. 목욕탕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탄약이 담겨 있던 상자를 이용했다. 미국에서 지원 받은 양질의 나무 상자였는데 탄약 중대장이 그것을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탄약 중대장 대위 김두섭과 상의하여 사계 청소하며 쌓아 두었던 나무와 나무 상자를 맞바꿔 목욕탕을 짓기로 하였다. 야외 훈련을 하며 눈여겨 뒀던 마을 농가의 논에 가마니로 덮어 두었던 딱딱하게 말려놓은 흙벽돌을 구해왔다. 거래는 마찬가지로 물물교환이었다. 흙벽돌 주인을 만나 사계 청소를 하며 베어 둔 나무와 맞바꿀 것을 제안했다. 주인은 웬 횡재인가 싶은지 선뜻 수락했다. 인접 공병 대대장에게 땔감나무를 주고 시멘트 10포와 교환하여 훌륭한 목욕탕을 지었다. 춘하추동 병사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목욕하는 중대는 전군에서 우리 중대뿐이었다. 몸이 깨끗해야 내복이 깨끗하고 이도 생기지 않는다.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대장 윤필용 대령이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대장 관사는 민간인 집을 얻어 살고 있던 터라 목욕탕이 없었다. 연대장 윤필용 대령은 “11중대장, 오늘 목욕할 수 있나?”라며 전화로 묻고 일주일에 한 번 목욕탕을 찾았다.

“연대장님 일주일에 두세 번 목욕하시죠.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2시간 전에만 지시하십시오. 목욕료는 무료입니다. 돈 받으면 세금내야 합니다.”

한바탕 웃었다.

“인간과 관련된 일은 어떤 것도 사소한 것은 없다”라는 말마따나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들로 수두룩했다. 주위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무궁무진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이후로도 중대 운동장을 개척하며 캐낸 돌로 배수로를 깨끗하게 정리, 세탁장과 건조장, 체력단련장을 만들었다. 영내에서 배수로 뛰어 넘기, 계단 오르내리기 훈련은 보병부대의 기본 훈련이다.

 

깨어 있는 생각

보잘것없는 사람도 위대하게 만드는 묘약들 가운데 으뜸이 ‘술’이다. 아마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손들고 토를 달자면 ‘깨어 있는 생각’ 정도가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건대 내게 있어 군대 생활은 ‘깨어 있는 생각’의 연속으로 언제나 슬기와 지혜를 발휘하며 건전한 생각으로 부지런하게 초급장교 시절을 보냈다.

연대 군수과에서 해야 할 월동준비 김장을 연대장 윤필용의 지시로 책임진 적이 있었다. 배추, 무, 그리고 일체의 양념까지 동두천 농협으로부터 납품을 받았다. 철저한 검수 과정에서 품질 미달로 감량을 때려, 정량의 반 이상을 더 납품받아 김장을 하게 되었다. 당초 예정량의 130퍼센트 김장을 담글 수 있었으며 10퍼센트 이상의 많은 양의 배추와 양념에 대해 연대장에게 보고를 하면서 남은 배추를 어디에 쓸 것인가에 대한 건의를 하였다.

연대장은 빨리 사진사를 불러서 사진을 찍으라고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장을 넉넉하게 하고도 소금에 절인 배추가 많이 쌓여 있었고 감량 때린 고춧가루, 마늘, 파, 심지어 생강까지 깨끗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을 사진사는 촬영했다.

“연대장님, 충분하게 김장을 담갔습니다. 중대별로 보급하고도 절인 배추가 8톤 가량 남았습니다. 이것을 결혼한 하사관들, 장교, 연대 대대의 간부 식당, 격오지 부대 등에 분배해서, 김장하도록 건의합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연대장은 180cm의 건장한 몸으로 165cm 신장의 나를 끌어안았다.

“이진삼, 알아줘야 해. 왜 작년엔 이렇게 못 했지?”

연대장은 곧 사단장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실을 보고했다.

나는 주‧부식(쌀과 부식) 납품 과정에 동두천 농협과 연대 군수과(S-4)와의 밀착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시로 촌지 거래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72연대의 김장에 관한 소문이 군단에 퍼지면서 군단 감찰부에서 확인까지 나왔다. 일개 중위가 김장을 맡아 처리한 것도 그렇고 그 일로 부대 사기를 높였다는 것에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연대 내 하사관들은 자신들에게 엄격했던 사단 교육대 이진삼 중위가 “김장을 해줬다. 앞으로 장군이 될 인물이다”라며 몹시 좋아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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