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8사단 21연대 3대대장

1972년 1월 27일, 8사단 21연대 3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포천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처음 부대에 도착해 파악한 것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였다. 지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늘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처럼 병사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첫째도 임무, 둘째도 임무, 셋째도 임무였기에 임무수행을 위한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강조했다.

전투의 3대 필수 요소가 정신, 체력, 전투기술이다.

부대는 무엇보다 초급간부인 분대장, 선임하사, 소대장, 중대장에게 달려 있다. 한번은 소대장들의 BOQ(독신자 숙소)에 가보니 모포가 널브러져 있고, 소주병이 굴러다니는가 하면 책들이 헝클어져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녁에 그들을 관사로 불러들여 “이 봐 소대장들, 군 생활 멋지게 해보자. 소대장들이 멋있다는 소리 들어보도록 해야지”라고 했더니 BOQ를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것을 사단의 감찰참모가 보고는 그 길로 사단장에게 “21연대 3대대 소대장 BOQ에 가보니 호텔보다 더 잘해놨더라”는 보고를 했다. 그러자 사단장 장봉천 준장과 연대장 노태우 대령이 우리 대대의 BOQ를 둘러보고는 사단 내 소대장들에게 견학을 지시했다. 사단장은 사단 전체회의 때 나를 불러 칭찬과 함께 격려금을 주었다. 나는 그 돈으로 소대 장교 숙소의 난방장치와 조명장치를 설치해주고 간부 휴게실 겸 연구실도 마련해주었다.

“부대의 우열은 간부의 우열에 비례한다.”라는 표어를 간부 연구실에 부착했다. 5공병여단장 장영근 대령에게 부탁, 대대장 관사의 연구실을 설치했다. 책상과 걸상을 제작하여 20명 이상의 장교, 하사관이 계급별 토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1개월에 한 번씩 전 대대원 특별 정신교육을 하고, 나이 많은 하사관들은 큰 형님이나 부모와 다름없으니 병사들을 자식 같이 보살피도록 독려했다. 실제로 하사관 가족들은 병사들의 옷 손질을 해주는 등 골육지정으로 똘똘 뭉치도록 했다.

“부모형제 떠난 병사 자식 같이 보살피자. 저 이름 모를 산과 들에서 적과 싸우다 쓰러질 때 다친 상처를 싸매주고 물을 먹여주며 마지막에 시체를 걷어주는 것도 전우라는 것을 알고 철석같이 단결해야 한다. 이때 부모님과 친구들은 옆에 있을 수 없고 오직 전우만이 있을 뿐이다.”

병사들이 적과 싸우다 쓰러질 적에 “선임하사님!” “소대장님!” 또는 “중대장님!” 하고 부른다. 어머니 아버지를 찾는 병사는 없다.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소대장님 위험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하면서 숨을 거둔다.

직접 사병들을 접촉하지 못하는 대대장이 되다보니 초급장교 시절의 부족했던 점이 느껴졌다. 만약 내게도 초급장교 때 나와 같은 대대장이 교육을 해줬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윤필용 장군의 미련

“이 중령, 윤필용 장군이 계속 당신을 수도경비사령부 33단장으로 보내라고 하는데?”

서울로 2박 3일 외박을 다녀온 연대장 노태우 대령이 나를 연대장 공관으로 불러 대뜸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요?”

“연대장인 나로서는 안 된다고 그랬지. 그런데 그 양반 말을 일방적으로 거절할 순 없잖아. 이 중령 본인 의사를 물어본다고 그랬지.”

“저는 안 가겠습니다. 제가 대대장으로 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취임식에서도 우리 3대대는 강력한 전투력을 증강하고 충성을 다하자고 다짐, 약속한 이진삼이 중간에 우리 대대원을 버리고 서울로 가면 안 됩니다. 계속 대대장 하면서 연대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노 대령은 그 자리에서 윤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령관님, 이진삼이 안 가겠답니다.” 사실은 노태우 대령은 3개월 후면 연대장 임기를 마치고 먼저 떠날 입장으로 나에게 서울로 가서 윤필용 장군을 모시라고 했다. 사실 수경사는 서로 가고 싶어 하는 자리다. 그러나 나는 정들은 부하들과 헤어질 수가 없었으며 서울지역 근무를 피하고 싶었다.

 

위풍당당 3대대

대대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운천 지역에 있던 미군 여단이 철수했다. 미군들이 주둔했던 많은 막사가 비게 되자 군단에서는 우리 3대대로 시설을 포함한 각종 장비의 경비임무 명령을 내렸다.

미군이 주둔했던 빈 막사를 보는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취사장과 식당을 지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972년 당시 각 중대는 대대 취사장에 식사당번 8명이 교대로 차출되어 밥과 국, 반찬 3가지(1식 3찬)를 운반, 각 내무반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던 터라 여러 모로 불편했다.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길로 나는 5군단 작전참모 김복동 대령에게 달려갔다. 부탁을 받은 김 대령은 두말 않고 군단 공병참모에게 전화를 걸어 제일 큰 강당 건물을 지정해 주었다.

보안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영근 5공병여단장의 도움을 받아 시멘트를 비롯한 여러 재료들을 얻어 손재주가 있는 하사관들을 시켜 그럴듯한 식당을 짓도록 했다. 대대원 전원이 식사할 수 있는 식탁과 의자를 들여 놓을 만큼의 크기로 지은 다음 음향 전기장치와 무대 조명장치도 설치하였다. 식당내부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만들고 산정호수 수로를 돌려 물청소가 가능하도록 했으며, 식당 입구에 대형 선풍기를 설치하여 환풍과 실내온도 조절을 가능하게 했다. 간부식당은 폐쇄하고 대대장과 중대장 전 대대원이 자유배식을 함으로써 인력과 시간 절약은 물론이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사시사철 실내 교육과 오락회 개최나 영화 관람 등에도 전천후로 활용했다. 대대 식당이 전투력 증강의 교육장이 되었다. 군사령관과 군단장도 놀랐다. 당시 8사단 사단장실은 슬레이트 지붕에 콘크리트 벽돌집이었다. 각 참모부는 낡은 퀀셋 건물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대대 관내인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야미리 쇠골 철광산 박임호 소장에게 부탁해 돌을 이용해 대대 역내 배수로를 정비하고 역내 도로에 자갈을 깔아 춘하추동 먼지 없는 내무반이 되었다. 때마침 정부에서는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었기에 군단장이 우리 대대를 방문한 후 전 군단에 새마을 사업을 지시하였다.

나는 거기에서 끝내지 않고 내친김에 큰 나무들을 이용 평행봉과 골포스트를 만들어 체력단련을 하도록 했으며, 각 중대 화장실도 깨끗하게 개축하였다. 대대원들의 사기가 충천했으며, 전투력 증강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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