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저 이름 모를 산과 들에서 적과 싸우다 쓰러질 적에 다친 상처를 싸매주고 물을 먹여 주며 마지막에는 시체를 거두어 주는 것도 전우임을 인식하여 철석같은 단결을 하여야 한다.

병사들은 “소대장님, 분대장님, 위험합니다. 조심하십시오.” 하면서 눈을 감는다. 이 때 옆에는 형제와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오직 전우만이 있을 뿐이다.

- 이진삼 -

 

최초 사단장

★★

참모총장 황영시 장군은 사단장 결정이 되자 총장실로 나를 호출하였다.

1980년 7월 29일, 사격지도단장을 마치고 9공수특전여단장으로 보직 받은 지 28개월 후인 1982년 12월 6일 소장으로 진급, 동기생 중 유일하게 사단장으로 보직 받았다.

“총장님, 대한민국 전방 중 가장 힘들고 오지인 험한 사단으로 보내주십시오.”

나는 가장 험한 21사단을 희망하였다.

황영시 총장은 대통령이 결재하면서 나눴던 이야기를 전했다. 대통령은 이번 교체되는 사단장 5명 중에서 나를 지적하며 “이진삼 내보내시오. 전형적인 야전성 있는 군인이오. 25사단 72연대 윤필용 연대장 밑에서 중위 중대장으로 윤 장군이 서울로 외출 나올 때마다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공비든 간첩이든 끝까지 추격하는 충청도 부여 출신”이라고 했다는 말을 전하면서 황 총장은 대통령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진급은 대통령이 결정하지만 보직은 내가 결정할 수 있지.”

“이번에 21사단장 임기가 다 된 걸로 아는데 그곳으로 보내주십시오. 정규 육사 출신 21사단장은 제가 처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재차 강력히 요청하자 황 총장은 신치구 장군에 이어 나를 21사단의 사단장으로 발령 냈다. 이후 황 총장은 본인이 자처해 21사단 보직을 원한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2년 1개월 동안 나는 전면이 제일 넓고 험준한 산악사단에서 혼신의 노력을 했다. 넓은 지역의 경계와 작전을 비롯하여 땅굴 발견 기초를 다지고 땅굴 발견 작전에 들어갔다.

 

운명은 만드는 것

“이진삼 장군이 21사단장으로 올 사람이 아니야. 다시 알아 봐. 육군본부로 전화 걸어 확인해!”

사단장 신치구 장군은 내가 21사단장으로 온다는 연락을 받고 잘못 들은 줄 알았다고 했다. 서울 근처에 근무할 장군이지 험한 지역에 올 사람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단 참모장 김동준 대령에게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확인하도록 했다. “확실합니다. 21사단장을 본인이 희망하였답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21사단장으로 부임하는 것을 믿었다. 21사단장은 대부분의 장군들이 꺼리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21사단장, 3군단장, 1군사령관 등 지휘관 보직 때마다 내 고집대로 최전방의 근무지를 택했다. 좋은 것만 찾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일신의 영달을 위함보다는 어렵고 힘든 직책을 군인의 보람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솔선수범이다. 솔선수범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21사단은 전방 최고 오지의 험한 산악 지역으로 지형뿐만 아니라 기상과도 싸워야 한다. 혹한, 폭설, 강풍, 수해, 200km에 달하는 도로망 유지, 급커브, 경사, 빙판, 교통사고 등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단 내의 전방을 차로 가는 게 아니라 때로는 헬기로 가야 했다. 더구나 겨울 보급, 급수, 세탁, 목욕 등 병사들 고생이 많다. 서부 지역 지휘관들은 그 상황을 이해는커녕 상상도 못한다.

운명이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수도권의 보직을 마다하고 험하고 어려운 곳을 찾아 들어 간 것 또한 오늘의 내가 있게 한 것이다.

 

산악사단장

양구 지역 죽곡리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산악사단은 양구군 방산면과 동면, 남면 일대를 책임지는 동부 최전선 지역이다. 특히 이 일대는 6·25전쟁 당시 격전지로서 펀치볼 전투를 비롯하여 해병대의 도솔산, 피의능선 가칠봉 전투 등 전쟁사에 길이 남을 수많은 전적비가 세워진 최전방 산악으로 피아간 치열한 격전지다. 한국전사에 길이 남을 한국군과 미군이 악전고투했던 속칭 김일성, 모택동, 스탈린 고지를 앞에 둔 백석산(1,142m) 문등리, 사태리 계곡, 대우산(1,179m) 등도 있다.

1990년 3월 3일, 제4땅굴이 발견된 가칠봉은 6·25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 중 하나다. 6·25 당시 김일성은 가칠봉 일대를 일컬어 ‘남조선 장교의 군번줄 한 트럭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을 만큼 전략 요충지로 피아간 치열한 교전 지역이었다.

취임식에서 나는 백두산부대의 전통과 동부 최전선 부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최강의 산악전투부대로 육성할 것을 다짐했다. 사단장으로 부임하자마자 부대를 파악, 적 침투에 철저히 대비했으며 무엇보다 적의 전면전에 대비한 산악, 야간, 동계, 근접 전투훈련을 강화하였다. 일단 유사시 현장에 뼈를 묻을 각오로 진지공사 등 전투 준비와 훈련에 최선을 다 하였다. 평시에 흘린 땀은 전시에 피와 맞바꾸겠다는 사단 전 장병들의 각오는 대단했다.

1984년 8월 일요일 오후, 계곡에서 관내 지휘관들 가족을 위한 불고기 파티를 하던 중 떠오른 시상(詩想)을 즉석에서 ‘영(靈)의 계곡’으로 읊어, 북한의 남침 후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18일간의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983고지(피의 능선)의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영(靈)을 기리며 토해낸 말을 훗날 후배들이 비를 세웠다.

아군 326명이 전사했고, 414명이 실종되었으며 2,032명이 부상당했다. 북한군은 1만 5천여 명이 사망 또는 부상당하는 등 최대의 혈전장이었다. 피로 계곡을 적신 피의능선 전투에서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찾지 못한 행방불명 전사자가 1,5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 대 북괴와 중공군 지휘관들의 결전장으로 지역 확보를 위한 사생결단의 장으로 김일성이 수차 방문, 전쟁을 독려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심리전으로 귀순시킨 신중철

귀순자를 유도하기 위해 선무공작으로 시청각 심리전을 펼쳤다. 대북방송, 시각 매개물 설치, 전단 살포, 심리전 요원화 등 간첩을 잡았던 경험을 살려 대북 전단 책자 등의 내용을 심층 검토했다. 물론 북한도 우리를 향해 심리전을 펼쳤지만, 전력이 부족한 때문인지 우리만큼 활발하지는 못했다.

1983년 5월 7일, 휴전선을 넘어 북한 13사단 민경대대 참모장 신중철이 귀순해왔다. 현역 참모장의 귀순은 휴전 후 처음이었다. 신중철은 “김일성 부자의 계속되는 전쟁 준비에 따른 고달픈 군 생활과 남한의 발전상을 알고 귀순했다”는 진술과 함께 “북한군이 사단 관할구역 내에서 땅굴을 파고 있다”는 귀중한 정보를 주었다. 땅굴 탐사에 대한 나의 집념은 더 강해졌다. 대대적인 땅굴 탐사 작업을 강행했다. 30여 곳에 시추작업을 벌였으나, 험한 지형과 기술상의 어려움으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땅굴에 대한 집념은 21사단장 2년간 기초를 다지고 떠났다 중장으로 진급, 특전사령관을 사양하고 21사단을 관할하는 3군단장으로 1987년 1월 부임하여 땅굴 발굴 작업을 계속 하였고 1989년 4월 3군단을 관할하는 1군사령관으로 부임, 1990년 3월 3일 끈질긴 노력과 집념으로 제4땅굴을 발견하였다.

땅굴 탐사 작전에 대한 7년여의 경과는 15장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