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그의 일생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삶의 연속이었다. 국가를 위하여 싸우자고 함께 다짐했던, 전우들을 먼저 간 전우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현충원을 찾을 때마다 용서를 빈다. 차라리 그가 적의 흉탄에 쓰러졌다면 영광스러운 마지막이 되었을 것이라고 표현한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정의롭게 살고자 노력했던 그의 군 생활은 파란만장 그대로였다. 부하들에게 강력한 교육훈련과 전투진지 요새화 등 많은 것을 강조하고 요구한 것은 지휘관 본연의 자세다.

변화무쌍 세상 속에서 그의 애국심은 만고불변할 듯하다. 본인은 “머리 안 좋다”, “충청도 촌놈이다”라고 겸손을 위장하지만 책의 모든 장마다 그는 치밀하고 명석한 글로벌 군인이었다.

“주어진 임무 외에 예견되는 임무까지 찾아서 수행하라”는 자신의 수칙대로 그는 지시받지 않은 그러나 해야 할 임무를 자청하곤 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방첩부대에 육사출신의 장교가 없음을 알고 자원하여 만삭의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전장으로 향하는 그는 지시받은 명령만을 수행하는 수동적 충성을 넘어 스스로 찾아 하는 능동적 충성을 바탕으로 명시된 임무 외에 추정된 과업도 찾아서 했다.

북한은 1967년 한 해에만 118회의 특수 훈련된 무장공비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대한민국정부를 전복하려 했으며, 21사단 부연대장 김두표 중령과 그의 가족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의 이진삼 대위는 군의 자존심을 내세워, “북이 도발하면 공격하지 마라. 강력한 대응은 남북 대화에 장애요소다”에 상반되는 대북 응징보복을 결심한다. 작전 구성원 선발과정이 참으로 위태롭다. 바로 얼마 전까지 총을 겨누던 남파 간첩들 중에서 4명을 선발·전향시켜 3차례의 응징보복 작전을 실시한다. 대원선발 후 훈련과정 내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두려울 것 없는 군인이지만 또한 아버지며 남편이기에, 작전 중 북한군에게 체포되었을 경우 감당해야 할 모욕과 슬퍼할 가족으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비장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작전은 성공이다. 총 33명의 북한군 사살과 적진의 정보수집 등으로 우리 군의 위력을 보여주었으며 실제로도 대북 응징보복 작전 이후의 북한의 도발 빈도나 패턴의 변화가 있었다.

이후에도 임관재, 박일근을 비롯한 무장간첩들을 소탕,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러 왔다는 김신조를 전향시켜 1·21사태 시 작전을 수행하였고, 21사단장 시절 북한 민경대대 참모장 신중철을 시청각 심리전으로 귀순시키는 등 간첩과 북한군 잘 잡는 군인으로 유명세를 탄다.

거절하기 어려운 서울 거여동 공수특전사령관, 용인 3군사령관 등 수도권 근무를 마다하고 가장 험한 산악지대 21사단장, 3군단장, 1군사령관을 자원한다. 그는 중령이 자신의 최고 직위일 것이라 생각했다던 그의 말과는 달리 처음부터 야전성 있는 전투지휘관 장군 수업을 스스로 받은 격이다. 3개 지휘관을 같은 지역에서 역임하며 7년에 걸쳐 동부전선 GOP 고지대 145미터 깊이에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려운 땅굴(제4땅굴)을 발견해내고야 만다. “하나의 땅굴은 10개의 원자탄보다 낫다”는 김일성의 땅굴굴착 명령에서 알 수 있듯 땅굴 발견은 측정불가의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제4땅굴 발견의 수훈자인 이진삼, 박영익 두 장군이 훈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은 존경을 넘어 영웅적인 장군들이다. 이제라도 국가가 훈장을 수여하길 독자들은 건의한다.

우리나라는 동계올림픽 1회에서 15회까지 노메달이었다. 1991년 12월 그가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부임한 후 제16회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금 2, 은 1, 동 1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세계 10위, 아시아 1위를 쾌거를 이룬다. 1992년 바르셀로나 하계올림픽에서는 금 12, 은 5, 동 12개를 획득하여 세계 7위의 성적을 거둔다. 특히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여 온 세계에 대한민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영광의 순간도 있었다.

2008년 부여·청양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가안보에 주력하고, 지역구인 충남 부여군에 지역구 주민의 숙원이던 4년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설립을 공약 없이 이루어내고 2011년에는 국립종합대학교로 승격시킨다.

그가 탄탄대로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다. 3·15 부정선거 비협조로 당한 감시, 1965년 동아방송 조동화 사건의 누명, 1973년 윤필용 장군 사건으로 15사단 부연대장으로의 전출, 1986년 정보사 사건, 그의 삶은 오히려 파란만장하다. 사건 발생 7년 후 1993년 본인은 알지도 못했던 사건으로 참고인에서 순식간에 피의자가 되어 실추된 명예와 심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권력에 의한 엄청난 정치보복이라 하는 그는 참으로 억울해 보인다.

자서전 형식의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는 2016년 출간된 《별처럼 또 별처럼》에 베트남전과 연대장 시절의 일화가 더해져 딱딱한 이론서와 달리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수필 같은 증보개정판으로, 백선엽 장군이 추천사에서 밝혔듯 독일 롬멜 저서의 《보병전술》을 능가하는 실전을 통한 전투 경험서다. 따라서 이 책은 장교는 물론 모든 사병, 일반인 구별 없이 두루 읽어도 좋겠다.

골수 깊이 내재화된 그의 군인정신은 그를 영원히 군인이게 할 것이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부상 한 번 없었다는 그가 전설 같기만 하다. 전설의 풍운의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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