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침투] 08 반전 Ⅰ
[목숨건 침투] 08 반전 Ⅰ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9.16 13: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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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노란 편지의 의미

삶이란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더러 맴돌기는 하지만 한 자리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갈 수밖에 없다.

1973년 3월 23일, 윤필용 사건으로 15사단 부연대장으로 쫓겨 가기 일주일 전 일요일 오후, 8사단 박노영 사단장은 주말을 빌어 전방으로 온 우리 가족을 관내인 산정호수 근처 조용한 식당으로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사단장이 대대장 가족을 불러 식사하는 예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 자리에서 박 사단장은 내게 “서울 소식을 들었나?” 하고 물어왔다. 못 들었다고 대답하자 윤필용 사건을 알려주었다. 윤 장군과 내가 막역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귀띔해준 것이다. 소식을 접한 나는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3월 29일, 8사단을 출발하여 같은 날인 15사단 38연대 부연대장에 부임하도록 명령이 났다. 이런 경우는 없었다. 서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바로 발령지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황망히 15사단에 도착해보니 3일 전에 손영길 장군이 붙잡혀 간 터라 부대 안이 어수선했다. 대부분의 사단 참모들은 나 또한 같은 처지로 보고 있었다. 15사단장 김학순 장군에게 신고를 하고 돌아서서 나오려는 순간, 김 사단장은 내게 앉으라고 권하면서 편지 한 통을 보여주었다.

- 이진삼 중령은 내가 보장합니다. 앞으로 귀히 써주십시오. -

말하자면 15사단으로 쫓겨 가는 나를 위해 8사단장 박노영 장군이 15사단의 김 사단장에게 준 당부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만약 그 사실이 밝혀진다면 박 사단장이나 김 사단장 둘은 보직이 해임될지도 모른다. 육사 출신의 젊은 장교들을 무더기로 자른 강 사령관이 아니었던가. 살벌했던 당시의 군 분위기 속에서 박노영 사단장의 용기는 정말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박노영 사단장과 김학순 사단장은 예현2기 동기생이다. 그러면서 김 사단장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작전기획 분야를 공부해두도록 하세요.”

앞으로 작전참모의 보직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앞으로 감시받고 있을 나로서는 감히 엄두조차 못 냈던 일을 김 사단장으로부터 듣는 순간, 장군다운 말과 태도에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

73년 9월에 15사단 작전참모가 국방대학원에 갈 예정이어서 그 자리에 나를 보직시키겠다는 의중을 피력한 것이다. 작전참모는 대령진급에 유리한 보직이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3개월 후, 김학순 사단장은 15사단을 떠나게 되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차장으로 발령받았다. 이임 하루 전, 김 사단장은 나를 사단으로 불렀다. “참고 견디면 잘 될 것으로 믿는다. 내가 떠나게 되어 미안하다”며 후임인 박완식 장군에게 잘 말해두고 떠나겠다고 했다.

 

감시

“박완식 장군, 15사단장 영전을 축하한다. 그곳에 가거든 이진삼 중령 잘 돌봐줘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작전처장에서 전방 15사단으로 부임하는 박완식 장군(준장)은 육군본부의 차규헌 장군(소장), 이범준 장군(소장), 양원섭 장군(소장)으로부터 나를 잘 돌봐주라는 부탁을 받고 부임했다.

박완식 15사단장은 육군본부에서 받은 부탁과는 다르게 당시 2군단장이었던 김종환 장군이 천거한 육사 14기 박종원 중령을 작전참모로 임명했다. 나를 부탁했던 육군본부 장군들은 사단장 박완식 장군(준장)을 소신 없고 신의 없는 장군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나는 38연대 부연대장으로서의 임무를 최선을 다해 수행했다.

2년 후, 박완식 장군은 진급을 하지 못한 채 사단을 떠났으며, 준장 예편 후 미국으로 이민, LA에서 87세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나는 최전방에서 모든 것을 참아내며 연대장을 보좌하여 부연대장으로서 대대장 경험을 살려 연대참모 훈련, 전투단 훈련 등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3개월 후 서울 답십리동 집에 2박 3일 외출을 나왔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난 밤 12시 15분쯤,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사복 입은 보안부대원 2명이 있었다.

“무슨 일로 왔나?”

나는 따지듯 물었다.

“인사드리고 가려고 밤늦게 들렀습니다, 죄송합니다.”

2년 전 보안사령부 근무 시절 함께 근무했던 후배장교들이었다. 서울지구 보안부대 요원으로 임무를 부여받은 소령과 대위였다. 내가 외출 나온 것을 전방 보안부대에서 서울본부로 보고하고 관할(서울) 부대로 지시하여 내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하여 파악 보고하는 등 분위기가 살벌했다. 나는 보고하든 말든 소공동 ‘남강’ 일식집에서 1공수단장 전두환 준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전투정보과장 노태우 대령을 만나 식사하고 밤 11시경에 귀가했다. 전방에서 오후 2시에 출발 6시쯤 도착했을 때부터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까지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더 감시하지!”

“이젠 철수해야죠, 죄송합니다.”

그들이 돌아간 후 나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것이 민주주의 대한민국이란 말인가, 나는 대체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웠단 말인가…….’

15사단 깊은 산속 계곡 초가집 셋방 추운 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도 거른 채 출근했다. 박철순, 이응배 두 후배가 고향인 부여에서 면회를 왔다. 방이 좁아 여관에서 같이 자며 새벽 2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진운수 대표

“철순아, 시골에 가면 방앗간 있는지 알아봐.”

“왜요?”

“아무래도 내가 방앗간이나 하면서 새마을운동과 지역봉사 하며 나무도 심고 농사도 짓는 전원생활을 해야겠다. 또 한 가지, 대전에서 택시 사업도 해볼까 생각 중이다. 집을 팔면 택시 대여섯 대는 살 수 있지 않겠어? 은행융자 받아서 사장 겸 운전도 하면 어떨까? 내 이름이 이진삼 아니냐. 삼진운수라는 간판 걸고 모범적으로 친절하고 착실하게 회사를 운영해 대전에서 제일 유명한 회사를 만들어야지. 택시기사의 임금을 다른 곳보다 더 주고, 친절한 이미지 만들고, 택시에는 노란 칠을 해서 특색 있는 옐로우 택시라는 것을 알려 ‘삼진택시를 타면 안전하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고 군대에서 배운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관리’ ‘고용’을 통해 이익을 창출, 지역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보람을 찾고자 한다.”

이런 얘기를 찾아온 후배들에게 말한 것은 꿈이라기보다 현실적인 발상이었다. 중령이면 높은 계급이다. 사관학교 졸업하고 중령까지 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거 아닌가. 더구나 나의 조그만 소망과 꿈을 이루었으니 더 이상 여한이 없다. 육사 출신으로서의 긍지와 기백을 발휘하여 나름대로 성공하겠다는 각오를 다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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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09-18 14:06:11
지휘관은 준비가 돼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