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저희 대대는 이 없습니다

5군단장이 8사단 1개 대대를 순시하겠다고 사단에 지시하였는바 8사단에서는 21연대 3대대를 순시하도록 보고했다. 모자와 양 어깨에 번쩍번쩍 하얀 별 3개씩 총 9개의 별을 단 그 이름도 무서운 유병현 군단장이 차에서 내렸다.

나는 부대대장, 중대장 참모들과 도열하여 경례하고 군단장을 안내해 대대장실로 향했다. 군단장은 대대장실 입구에서 영접하는 사단장 박노영 준장, 연대장 노태우 대령과 악수하며 인사했다.

빈약한 토막사 대대장실에서 브리핑을 받던 군단장이 갑작스레 취사장으로 향했다. 군단장은 취사병들의 사타구니와 겨드랑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DDT가 들어 있는 헝겊주머니가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별 셋의 군단장이 취사병의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를 만지니 모두가 당황했다. 나는 의중을 꿰뚫고 군단장에게 말했다.

“군단장님, 저희 대대는 이 없습니다.”

내 말에 정작 긴장한 사람은 사단장과 연대장이었다. ‘감히 중령이 별 셋의 군단장에게?’ 군단장이 의아해하며 “대대장, 어떻게 이가 없나?”라고 물었다.

“군단장님, 우리 부대 하사관들은 부대의 어머니입니다. 우리 부대는 목욕을 1주일에 두 번 이상 합니다. 내복을 갈아입히는 것 또한 하사관들의 임무입니다. 저기 보이는 산정호수에서 흐르는 물을 부대 앞으로 흐르도록 돌려 야전목욕탕에서 목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군단장은 흐르는 물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요?” 취사장에서 병사들을 위한 밥과 찌개가 끓는 것을 확인하고는 군단으로 향했다. 군단장이 돌아간 후, 사단장과 연대장이 “대대장, 수고했어. 잘했어”라고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대대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군단장과 있었던 DDT 헝겊주머니 이야기를 했다. 군단장이 우리 대대를 여전히 자유당(1950년대) 시대의 군대쯤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조금은 불안했다. 군단장이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군단장은 다음 날 아침 군단 상황보고 회의에서 “나는 어제 군인 중의 군인을 보았다.”고 하면서 나를 “소신 있는 대대장”이라고 말한 것을 군단 인사참모 황관영 대령이 전화로 나에게 알려주었다. 그 후 군단장은 군단 내 대대장급 지휘관들 동계 간부 집체교육을 수료하는 자리에서 8사단 21연대 3대대에 가서 지휘통솔에 대한 토의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화장실을 찾은 1군사령관

이번에는 별 넷의 최세인 군사령관이 우리 대대를 방문한다는 연락을 사단으로부터 받았다.

빨간 판에 반짝이는 별 넷을 단 군사령관의 헬리콥터가 우리 대대 연병장에 내려앉았다. 대대장실에서 브리핑을 받은 군사령관은 병사들의 화장실로 향했다. 대대는 5개 중대가 있고 옆으로 각 중대별 깨끗한 화장실이 있었다.

군사령관의 느닷없는 화장실 순시로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은 화장실 밖에서 지켜보았다. 군사령관은 병사들의 화장실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화장실 깨끗하게 잘 되어 있구나.” 하고 칭찬하자 나는 걸어놓은 화장지를 가리켰다.

“군사령관님, 저희 대대 화장지 이상 없습니다.”

“그래 어떻게?”

“화장지는 대대 보급관이 관리합니다.”

군사령관이 화장실을 들여다보는 것이 착잡하고 답답했다. 6·25전쟁을 겪으며 초급장교를 얼마 안 하고 장군이 된 터라 20년 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의 군인들이 보급품을 부정 처리 했던 생각에 화장지 확인차 화장실로 갔던 것이다. 연말에는 후방에서 비누, 칫솔, 치약 등 위문품을 보관, 부족한 보급품을 1년간 보충하여 썼다.

23년의 세월이 지난 1996년, 예비역 1군사령관 출신 모임인 ‘통일친목회’에서 최 사령관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이 총장, 혹시 산정호수 근처에서 대대장 하지 않았나요?”

나는 깜짝 놀라 옛 생각에 “그때 군사령관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지도 많이 받았지요. 그때 제가 결례한 거 같은데요.”라며 늦었지만 사과를 했다. 상급자에게 거침없이 말을 했던 것이 후회스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다. 당시 1군사령부 참모로 근무하고 있으면서 수행했던 이덕만 장군으로부터 “이 중령, 당당하게 말하는데 내 속이 다 시원합디다.”라는 전화를 받았다. 1군사령부로 돌아간 군사령관은 “나는 오늘 8사단 대대장으로부터 기합 받고 왔다. 앞으로 예하 부대 순시할 적에는 조심해야겠다.”고 했다 한다.

 

윤필용 사건

베트남 맹호사단장으로부터 귀국 후 수도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한 윤필용 장군이 1973년 3월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전방까지 날아들었다. 윤필용 장군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과 함께 저녁 식사 중 반주를 하면서 후계자 얘기를 나눈 것이 화근이었다고 했다. 윤 장군이 느닷없이 이후락 부장에게 각하께서 연세도 있으신데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후계자를 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을 꺼냈다. 술좌석에서 한 대화였다. 당시 박 대통령의 나이는 57세였다.

며칠 뒤, 신 사장이 박 대통령과 태릉에서 골프를 치면서 “나이도 있으신데 후계자도 생각해둬야지요”라고 말했다. 골프를 칠 땐 아무 말 않고 있던 박 대통령이 골프를 마치고 저녁을 먹으면서 “아까 했던 말이 무슨 얘기야?”라며 신 사장에게 따지듯 물었다. 신 사장은 윤 장군과의 술자리에서의 일을 보고했다. 화가 난 박 대통령은 보안사령관인 강창성에게 내사를 시킨 후 칼을 휘두르게 했다.

내가 겪었던 윤 장군은 박 대통령에게 불충한 마음을 가졌을 어떤 이유도 없었다. 오히려 윤 장군의 박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이 차고 넘쳤으면 넘쳤지 그런 마음을 가질 분이 아니었다. 말을 꺼낸 후계자 운운은 이후락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뿐, 군인인 지신을 운운한 것은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의도하지 않은 실언이 신 사장을 통해 잘못 전달된 듯했다. 윤 장군을 알고 있는 이들 대부분은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윤 장군은 우수한 군인이었다. 다만 내가 항상 걱정했던 부분은 스스럼없이 하는 말 때문이었다. “형님, 장군이 되셨으니 말씀을 조심하셔야 합니다.”라며 건방지게 충언하기도 했던 1965년 생각이 났다. 더욱 민감한 것은 윤필용 장군 직책이 수경사령관 신분으로 근위 대장이었으니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나는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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