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침투] 02 국군 장교가 되다 Ⅶ
[목숨건 침투] 02 국군 장교가 되다 Ⅶ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4.15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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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보병학교 구대장

1963년 5월 4일, 동기생 24명과 함께 광주 상무대 보병학교로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연대장 윤필용 대령은 “육군본부에 연락해 명령을 취소하겠다.”고 나섰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보병학교로 가겠다고 했다. 연대장은 나를 떠나보내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그간 고생했다. 열흘간 휴가나 다녀오지.”라고 하면서 서울 가면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정호용, 김복동 등을 만나볼 것을 권했다.

전두환 소령은 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관을 거쳐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에 보직되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필동 사무실을 찾아갔다. 수위가 인터폰을 통해 “이진삼 중위 면회 왔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잘 모셔”라는 전두환 소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너무 신기했다. 인터폰으로 통화를 한다는 것 자체도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선배가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에 몹시 고무되었다. 그는 운전기사 딸린 차를 내주면서 서울 친지들을 찾아뵙고 오후 5시 30분까지 소공동의 ‘남강’ 일식집으로 같이 올 것을 지시했다.

오후 5시 30분, ‘남강’ 일식집에는 차규헌, 김진구 대령을 비롯해 김복동, 노태우, 권익현, 전두환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도착해 있었다. 일개 중위를 위해 많은 선배들이 자리를 함께해 주었다.

“휴가 나왔으니 잘 쉬고 광주 보병학교 갔다 와라. 나도 보병학교 근무했다. 전군에 배치되는 장교 교육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곳에서 근무하면 이진삼은 전군에서 유명해지고 보람을 찾을 테니 말이다.”

선배들은 입을 모아 내게 힘을 실어주었다.

다음 날,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하자 2년 선배인 윤태균 대위(505방첩부대 조사과장)가 마중 나와 영접해 주었다. 저녁에는 보병학교 생도연대장인 신현수 대령을 모시고 일식집으로 안내하며 “이진삼을 잘 부탁한다.”고 당부하며 학생연대 훈육관 보직을 부탁했다. 내가 맡은 직책은 ROTC(학도군사훈련단) 1기생 신임 소위들의 초등군사반 5개월간의 군사 교육이었다. 그때 함께했던 많은 ROTC 신임 장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이진삼 구대장은 언제 화장실 가고 언제 밥 먹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야간 사격 훈련을 할 때조차 그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의 사격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기회교육 차원에서 신임 소위들에게 정신교육을 했다.

“이 더운 여름, 여러분은 지금 고향, 친구들, 그리고 부모형제를 떠나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를 지키기 위한 자랑스러운 군인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민과 국가를 위한 간부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 군 간부로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우리는 무한한 긍지와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

내 얘기를 들은 신임 장교들은 모두 공감했고, 훈련 받는 내내 나와 함께 호흡했다.

“이진삼이, 거기서 1년만 있으면 전군에서 유명해질 거다.”라며 힘을 실어주었던 선배들, 그리고 내게 교육을 받고 졸업한 장교들이 전후방 부대로 발령받아 교육받은 그대로 실천에 옮길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흐뭇했다.

낙하산 공수특전 교육도 자진하여 받았다. 육군본부 지시로 《신총검술 교본》을 만들어 전군에 배포하였으며, 계획에 없던 유격훈련도 피교육 장교들과 똑같이 받는 등 말로만 하는 장교가 아닌 몸소 실천하는 장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공대장

육군본부의 정상문 대위로부터 보병학교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육사 3년 선배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중위 담당자였다. 제1공수특전부대와 방첩부대에서 전입 상신이 왔다면서 내게 어디로 가겠느냐고 물어왔다.

“둘 다 비정규군 아닙니까?”

나는 두 군데 모두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1964년 7월, 서울 통인동 방첩부대 본부로 명령이 났다. 제1공수특전부대는 당시만 해도 장병이 6백여 명에 지나지 않는 비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방첩부대도 비정규군이긴 매한가지였다. 방첩부대로 명령이 난 것은 그곳에서 강한 요청이 있어서였다.

내가 간 자리는 소령 자리였다. 말하자면 중위(대위 예정자, 1964. 10. 1.) 계급으로 소령 자리에 갔다. 대위로 진급하기 위해선 2개월 이상 더 있어야 하는 중위의 신분으로 공비와 간첩을 잡는 특공대장 자리에 앉은 것이다. 소위 임관 5년 만인 1964년 7월 22일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내가 예상치 않은 어렵고 위험한 대공 분야 직책을 부여 받았다.

나는 방첩부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방첩부대 명령을 받은 장교는 방첩학교 기초반 교육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바쁜 직책으로 미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임무수행에 나섰기 때문이다. 간첩을 회유 역이용, 접선을 통해 간첩을 잡는 업무를 담당하는 정도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맡은 방첩부대는 사령부 직할부대로 지휘할 병력이 모두 28명이었다. 이는 다른 지역의 방첩부대가 병력 3명을 데리고 소령이 지휘를 맡은 것과는 편성이 달랐다. 방첩대장의 업무와 관련, 교육 자료를 받아들고서야 내가 맡은 업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 중차대한 업무를 소령도 아니고 대위도 아닌 대위 예정자인 중위에게 주었으니, 나로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수 임무 훈련교범도 없었다. 특공부대 임무인 역용공작 교재를 만들어냈다. 전국 어디서든 적이 나타나면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다. 지휘관들에게 지휘 조언을 해주는가 하면 돌발 상황에는 직접 몸을 던져 적을 검거 내지 사살했다.

“간첩 작전 현장으로 방첩부대 특공대장 이진삼 대위를 불러 작전 조언을 받아라.” “이 대위가 만든 교재를 작전에 참고하도록 해라.”라는 지시가 하달되곤 했다.

대남 적화통일의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북한은 1964년부터 무력남침의 호기를 조성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무장간첩을 전후방에 침투시켰다. 주요 시설의 파괴와 요인암살을 획책하는 등 민심을 교란시키는 데 총역량을 집중했다. 남북의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1964년 8월 2일과 4일, 월맹 어뢰정이 공해상에 정박 중인 미국 함정을 공격하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분노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할 것을 선언함으로써 이른바 제2차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다. 베트남이 공산주의로 인해 다시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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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04-17 20:58:25
사람에 맞는 자리가 중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