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전방 연대장

1977년 8월 4일, 전방 20사단 61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군에서는 연대장과 사단장을 가장 보람 있는 지휘관이라고 해서 흔히 ‘지휘관의 꽃’이라 부르곤 한다. 그만큼 연대장은 지휘관으로서는 최고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연대장으로 간 20사단은 전방 GOP사단이다.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 곽영배 장군이 참모총장의 결재를 받아놓았다. 곽 장군은 내가 보안사에서, 참모장으로 모셨던 분이다. 내가 올렸던 결재를 한 번도 반려하거나 부결시킨 적이 없을 만큼 나에 대한 신뢰가 돈독했다. 내가 대대장으로 나가기 전, 육군대학에 다닐 때에는 30사단장으로 있으면서 교육비를 여러 번 보내주었다. 돌이켜 보면 내 삶에 있어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나 많다. 이 지면을 빌려 내 삶에 동행했던 많은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나의 비문(碑文)을 “나는 신세지고 떠납니다.”라고 할까 생각 중이다.

 

군의 술 문화

1977년 8월 전방 20사단 61연대장으로 명을 받았다. 사단장 K 소장은 전군에서 술로 유명한 장군이었다.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사단장, 부사단장, 연대장, 참모장 들이 가족 동반, 넥타이 정장으로 속칭 단합대회라는 명분으로 모임을 가졌다. 연대장이 부임하면 술 마시는 주법을 부사단장과 참모장이 보여주게 되어 있었다. 컵에 양주 3/4, 얼음 1/4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단장에게 인사하고 “사단장님 주시는 술 즐겁게 잘 마시겠습니다.” 하고 팔짱을 낀 채 마시면서 지켜야할 수칙이 있다. '노털카', 잔을 놓거나, 털거나, 카 소리를 내면 벌주를 마시게 되어 있다. 술 못하는 나는 60연대장과 팔을 엮고 대작(對酌), 속칭 러브샷(love shot)을 하게 되었다. 나는 술에 입만 대고 넥타이를 제치고 셔츠 속으로 술을 부었다. 얼음덩이가 가슴, 배를 지나 벨트에 걸려 배꼽이 차가워 견디기 어려웠다.

사단장은 “이 대령은 술도 못하면서 어떻게 장군 되려고 하나?” 이어서 두 연대장들은 거뜬히 마시자 “자네들은 장군 될 자격이 있다.”라는 판정을 내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장군 안 되어도 좋습니다. 사단장님 장군 오래오래 하세요.”라고 말했다. 밖에서 경비 서는 헌병과 병사들은 우리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부대의 우열은 간부의 우열에 비례한다. ‘최상급 지휘관들이 수많은 부하들에게 생명 바쳐 싸우자고 어떻게 훈시할 수 있으며, 예하 지휘관 그리고 커가는 장교의 표본이 될 수 있는가’ 생각하면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을 태우고 나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났다. 나의 군 생활 자세와는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사단 위병소를 통과하자 위병장교가 참모장 전화라고 바꿔주기에 참모장에게 “나는 20사단 연대장 자격도 능력도 없다. 술 못 하니까. 공적 업무를 제외하고 나를 부르지 말라.”고 하며 사단장이 찾으니 돌아오라는 그의 말을 뿌리치고 연대로 귀대하였다.

단합대회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여름 해가 지는 시간 8시 15분보다 빠른 7시 반도 안 되어 해산했다. 사단장은 화가 났는지 부사단장과 참모장을 불러 가족들의 만류에도 만취 상태까지 술을 마셨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인 일요일 08:00시에 사단장 가족이 우리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10:00시경에는 사단 참모장으로부터 사단장이 만났으면 한다는 전달을 받고 “내가 어제 말한 대로 공적 업무가 아니면 안 가겠다.” 했으나 참모장이 어제의 썰렁했던 분위기와 아침에 사단장 만났는데 사단장이 침울하다는 말에 마음을 바꿨다.

“참모장! 우리가 왜 군복입고 있나? 이 사람아, 나라 지키기 위해 있다. 오후 2시까지 가겠다. 공적인 사단장 명령이라면 목숨을 바치겠다.”

사단에 도착하자 정문에서 보고가 되었는지 사단장이 문까지 나오면서 악수 겸 손을 잡고 들어가며 “이 대령, 내가 어제 말실수를 했소. 가족에게 내 말 잘 전해줘요, 나는 어젯밤 가족과 같이 밤잠을 제대로 못 잤소. 밤늦게 전화할 수도 없고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소.” 하기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술에 옷이 다 젖어서 돌아갔습니다.”라고 마음을 풀어 주었다. 사단장은 1969년 8사단에서 연대장 시절 사단 보안부대장을 했던 나와는 특별한 관계 등 덕담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사단장님, 건의 사항이 있습니다. 우리 사단은 서부 지역에서는 가장 험준한 속칭 알프스 지역으로 한국전쟁 시에는 백마고지 야월산 전투 등 치열했던 격전지입니다. 철책을 담당한 GOP사단으로 휴일에는 특별히 경계를 강화해야 합니다. 휴일에는 사단장, 연대장 외박외출도 금지 아닙니까? 군사 분계선과 철책을 담당한 지휘관이 매주 토요일마다 가족동반 만취한 상태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대장, 중대장들한테 보고 받고 상황 처리가 가능합니까? 각 부대에 예속된 포병, 전차 등 지원부대들은 연대장 없이 원활한 작전이 불가합니다. 또한 부대의 기간(基幹)인 성장하는 장교들에게 우리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12,000명의 GOP 전 사단 장병들이 주야로 전투 감시 체제에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고 존경하겠습니까?”

“여보 이 대령 8년 전 사단장과 연대장들은 소령에서 3년 만에 중령으로 특진한 이 중령, 육군대학 가려고 교재를 가져와 미리 예습을 하고 보안부대를 떠나 전방 대대장 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소.”

술 못하면서 어떻게 장군 운운하던 사단장은 나의 과거사를 들추기며 덕담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1969년 여름 8사단 16연대 탄약고에서 병사를 사살한 탈영병 어머니를 후방 보안부대에 연락, 오도록 하여 설득, 직접 체포한 것을 기억한다고 하면서 나에게는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20여 년 전 대위 시절 언론에 비쳤던 쌍권총 선글라스 이 대위가 적을 잡은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사단장님 토요일 행사는 중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끊고 단합대회가 부당한 이유 몇 가지를 더했다.

“그간 행사를 위하여 준비하는 가족들은 목요일부터 서울에서 장을 보아 버스에 싣고 전방으로 옵니다. 어느 연대는 부하들이 충성하기 위하여 연대 참모 가족, 대대장 가족들이 토요일 직속상관 모시려고 3~4일간 비상 체제에 돌입합니다.”

“지금 생각하니 이 대령 말이 맞아요. 그러지 않아도 토요일 행사는 하지 않기로 아침에 지시하였소.”

“군인 아파트에 집단 거주하는 하사관 초급 장교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사단장은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앉아 있다가 “우리 앞으로 잘합시다.” 하며 나의 손을 꽉 잡았다. 한편 연대장 가족들은 서울의 자식들을 시부모나 친정 부모에게 맡기는 등, 부담을 갖지 않게 되었다. 3개월 후 전방 60연대 3대대장 유운학 중령이 백마고지 측방 역곡천 월북 사건으로 사단장과 연대장이 해임, 전역되었다. 사단장은 6·25 전쟁 중 우수한 하사관 출신으로 현지 임관(현임)한 건장하며 호탕하고 남자다운 기질에 우수하고 특징 있는 군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역 후 간암 수술로 고충을 겪었으며 《다시 태어난 인생》을 책으로 남겼다.

내가 아는 20여 명의 유명한 선배 장군들이 술로 인하여 70세 전후로 유명을 달리했다. 동기생인 참모장 신대진 대령은 훌륭한 장군으로 소장 예편 후 위장 수술했으며 5년 전 고인이 되었다. 소련 장군들은 밤낮 없는 보드카 독주로 작전 실패한 전례가 있다. 미국 군인들과 공무원들 규정에 일과 시간엔 금주다. 대한민국에서 근무했던 미국 장군들은 후배 장군들에게 충고 제일성으로 한국 장군들과 칵테일 정도는 좋지만 술자리(방석집)는 하지 마라, 폭탄주 조심해라. 한국 장군들 술 실력은 세계 제일이다. 1961년 5·16후 박정희 군사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이었던 윤필용 장군은 수경사령관이었던 1973년 이후락 등 3명과 군 통수권자와 관련된 술자리 말실수로 고충을 당했다. 대한민국은 음주운전을 포함하여 술로 인한 인명, 재산 손실은 물론 알코올 중독자, 패가망신자가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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