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오기로 윤필용 예비역 장군을 찾아가다

감옥에서 나왔지만 윤필용 장군은 여전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 나는 전투복을 입고 대방동에 살고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몸을 사렸지만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벨을 눌렀다. 낯익은 운전기사가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

“아무도 못 오시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면서 문을 열었다. 현관까지 나온 윤 장군도 나를 확인하고는 집안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해관 엄마, 이진삼 대령 왔어”

윤 장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이 대령, 중령 때 나하고 헤어졌는데 전방으로 쫓겨 갔다며. 어디로 쫓겨 갔었지? 다 죽었는데 어떻게 살았어? 옷 벗지 않고 대령 되었구나.”

궁금한 게 많은 듯 윤 장군의 질문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형님이나 저나 잘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제가 항상 형님께 말조심 하시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와 어쩌겠습니까. 모든 것을 잊으십시오.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윤 장군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전방에서 전쟁이 일어났단 말이야. 전쟁에서 이기느냐 지느냐 위급한 상황이야. 병력을 열차에 싣고 전방으로 시속 100㎞로 가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시속 150㎞로 달리다보니까 내가 거기서 떨어진 거였지.”

당신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을 자조하며 빗댄 말이었다.

세월이 흘러 전두환 대통령이 예편한 윤 장군을 도로공사 사장으로 발령했다. 그때 나는 전방 21사단장으로 있을 때였으며 2박 3일 서울 외박 중에 도로공사로 윤 장군을 찾아뵈었다.

“제가 있는 양구 지역은 눈이 한 번 오면 녹지 않아서 비탈진 음달 길에는 차가 미끄러져 인사 사고가 잦습니다. 200㎞ 되는 도로작업을 위해 사단 병사들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가 애로사항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도로 빙판 방지를 위해선 염화칼슘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필요해?”

“우선 2.5톤 트럭으로 5트럭, 12톤이면 됩니다.”

그는 이내 기획실장을 불러 “이 장군 요구하는 대로 5톤 트럭이든 100톤 트럭이든 내주라”고 지시했다. 옛날과 다름없이 통 큰 사나이였다.

그러고는 “이곳까지 이 장군이 찾아왔으니 우리 도로공사 현황을 브리핑 하겠다”며 2m 지휘봉을 들고 직접 전국의 도로망과 장차 있게 될 도로건설 계획에 대해서 설명했다. 송구스러워 “기획실장에게 설명해 달라”고 했으나 끝까지 서서 직접 설명을 했다. 당당한 모습과 용기는 여전했다. 나에 대한 애정과 신의 관계를 재차 강조하며 “나는 이 장군이 반드시 군에서 성공할 것으로 믿었다”고 하면서 한사코 싫다는 내게 금일봉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땅굴 탐지 요원들을 위한 신형 난로와 취사용품 등을 구매하는 데 썼다. 그의 금일봉은 제4땅굴 발견에 큰 도움이 되었다.

 

3번의 드라마

안보, 전략, 산업 3개 과정으로 구성된 국방대학원은 국가 안보의 최고 교육기관이다. 학생들은 주로 국방부, 내무부, 통일부, 외교부, 국영기업체, 사법, 행정 분야 등에서 선발된다. 국방대학원 입교 3일째 되는 날, 뜻밖에 대학원장이 나를 찾는다고 해서 원장실에 갔다. 그곳엔 별 셋의 임지순 장군이 앉아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 잘했어요. 내가 도와줄 일 없어요?”

전과 달리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도와주실 일은 없습니다.”

내말이 끝나자 임 원장이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군대 생활 여기서 끝나요. 내 방에 자주 들러요, 이 대령.”

그러고는 교학처장을 불러 나를 잘 돌봐주라고 당부했다.

내가 임지순 원장을 처음으로 만났던 것은 2년 전인 1974년 9월, 부연대장을 마치고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계획발전장교로 일할 때였다. 임 원장은 소장으로 인사참모부장이었다. 그의 보좌관으로 제주도 출신의 김 대령은 육사 3년 선배로 나를 아꼈다. 어느 날 내게 “여보, 인사참모부장이 당신과 같은 고향, 부여 분이야. 인사나 드리지.”라고 하는 것을 괜찮다고 거절했다가 몇 번을 권유해온 터라 고마운 마음에 찾아갔었다. 여군 중사가 문을 열어 주기에 나는 들어가 경례를 하고 서 있었다. 그는 내게 앉으라는 말도 않고 쳐다보며 충청도 억양으로 “누구야?” 하고 물었다. “작전참모부 이진삼 중령입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그래, 부여가 고향이라고 들었다” 하고는 “잘해라”를 끝으로 서있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았다. 경례를 하고 뒤로 돌아 나오려고 문을 여는 순간, 차를 들고 오던 여군 중사와 마주쳤으나, 차를 마실 겨를도 없이 방을 나오고 말았다.

“김 대령님, 이러지 마십시오. 나를 망신 주는 겁니까?”

서운한 마음에 나는 선배인 김 대령에게 한마디 던졌다. 그러자 그가 미안해하면서 나를 이해시키려 애를 썼다.

“나를 위해서 인사하라고 한 것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그분께 진급시켜 달라고 하겠습니까, 보직 부탁을 하겠습니까. 제가 그런 사람입니까?”

따지듯 했더니 김 대령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이후 김 대령은 인사참모부장에게 나에 대한 이력을 자세히 전하고 다시 인사 갈 것을 권했으나 나는 찾아가지 않았다. 1976년 중장 진급과 동시에 국방대학원장으로 부임한 임 원장은 학생 신분으로 입교한 나를 만나자 2년 전의 1974년과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토인비는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다. 그러니 돌고 도는 역사의 궤적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인연을 따라 모였다가 또 그 인연을 따라 흩어질 수도 있다. 임 원장과의 만남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사람의 인연은 마무리가 중요하다. 임 원장은 그것을 나보다 먼저 간파한 듯했다. 국방대학원 졸업을 2주 앞둔 어느 날, 임 원장이 총학생회 학생장 정명환 소장을 불렀다.

“정 장군, 국방대학원 졸업하면 인사운영감으로 부임하시죠? 아무래도 정 장군이 육군본부를 다녀와야겠어요. 국방대학원에 다니는 5명을 포함해 10여 명이 전방 연대장을 희망하는 것 같은데 전방 연대장은 20사단 61연대 한 자리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가 볼 땐 적임자가 이진삼 대령밖에 없어요. 당신이 오후에 시간 있으니 육군본부에 다녀오시지요.”

2년 전 육본 인사참모부장 시절 냉정하게 대하던 것과 달리 나에 대해 신경을 쓰는 임 장군이었다. 정 장군은 임 원장의 부탁을 받고 육군본부를 방문했다. 인사참모부장 곽영배 장군을 만났다. 그가 책상서랍을 열고 서류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진삼 대령, 참모총장 결재 받아놨으니 염려 마세요. 나한테 맡겨 두세요. 내가 보안사령부 참모장 할 때 그 사람 인사과장 이었소. 간첩과 공비도 많이 잡은 공로자요. 대단했어요. 특히 보안사 장교들 계급별 직능을 분류하여 보직시킴으로써 능률 위주의 인사 등 인사군기를 확립하고 영관장교 47명을 심사해서, 육군으로 전출시키고 자원해 육군대학 입교 후 전방 대대장으로 갔어요. 벌써 세월이 흘러 연대장 나가게 됐어요. 염려마세요. 이것은 아무도 못 바꿔요.”

정 장군이 국방대학교로 돌아와 임 장군에게 보고하자 임 원장은 나를 불렀다. 정 장군이 임 원장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나를 참석시켰던 것이다. 나는 두 분의 장군께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국방대학원장 임 중장은 가끔 나를 불러 “나는 이제 군 생활 마지막 보직이다. 아무런 힘이 없어 이 대령을 봐주지 못해”라고 하면서 미안해했다. 2년 전 내게 냉정하게 대한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리는 듯했다. 임지순 장군은 본래 원칙주의자로 융통성 없는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또다시 임 원장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전역하고 마사회 회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당시는 마사회가 농수산부 산하 사업부서로 내부적으로 공금횡령과 마권 승부조작 등 이권을 두고 장난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임지순 회장은 이를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의뢰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의뢰했던 일들이 임 회장의 잘못으로 둔갑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알게 된 나는 위로차 마사회를 들렀다. 그때 나는 전방의 연대장을 거쳐 육군 사격지도단장으로 있을 때였다. 나를 보더니 임 회장은 “여보, 당신 말이야. 이번에 장군 될 거야. 내가 인사참모부장을 해봐서 아는데 이번에 정승화 장군이 참모총장이 되었잖아. 그 사람 매사에 정확하고 공명정대한 장군이야. 내가 볼 때 당신 장군 확실히 될 거야”라며 마치 내가 장군이라도 된 듯 좋아했다. 원래 말수가 적은 임 장군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마사회 문제로 복잡하신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나에게 설명해 주면서 마사회 정화 노력의 일환이었는데 국민들은 내 잘못으로 알고 있다고 토로하며 자진사태 의지를 밝혔다. 나는 잘 아는 농수산부 장관의 비서실장인 김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실장은 15년 전부터 나를 좋아하고 따랐다. 나는 김 실장과 통화하면서, 마사회의 실정을 설명하고 임 회장의 마사회에 대한 비리 부정부패 척결의지를 피력했다. 자체 수습차원에서 경찰에 수사의뢰한 내용도 덧붙였다. 마사회가 조사하여 처리하도록 부탁했다.

“형님, 알겠습니다.”

약 10분 후, 마사회를 감사하던 감사실장이 회장실에 들어와 “장관실에서 자체 처리 후 보고하시라는 지시를 받았다”며 감사를 중지하고 떠났다. 임 장군은 4년 전 인사참모부장 시절, 내게 냉정한 태도를 보였으나, 2년 후 국방대학원장으로 있을 때는 전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를 전방 연대장 시키려 애를 썼다. 그리고 다시 2년 후, 마사회장 임 장군과의 관계는 마치 작가가 만들어낸 드라마 같았다. 도움을 주고받는 조건관계는 아니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진지하게 남의 고충을 들어줄 줄 아는 인간 신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은 국립묘지에서 우리 관계를 잊지 않고 누워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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