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침투] 05 1960년대 후반 주요 사건 Ⅲ
[목숨건 침투] 05 1960년대 후반 주요 사건 Ⅲ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7.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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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윤필용과 김재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윤필용 준장과 김재규 소장,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쁜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육사 기수로는 2기인 김 장군이 8기인 윤 장군보다 선배였지만 나이는 별 차이가 없었다.

윤 장군 입장에서는 능력과 인품 특히 청렴도 등에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보안사령관을 맡아 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군 통수권자를 제대로 보좌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반면 김 장군은 자신이 육사 선배인 데다 박 대통령의 동향 후배라는 권위를 내세워 윤 장군이 자기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기만 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새로 부임해 온 김재규 장군 입장에선 윤필용 장군이 인정하는 나를 곱게 볼 까닭이 없었다.

 

신임 김재규 사령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만 돕는 건 아니다. 사람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1968년 2월, 윤필용 장군에 이어 보안사령관으로 부임한 김재규가 1968년 2월 23일, 609특공부대로 초도순시를 왔다. 김 장군은 지휘방침과 부대활동 등의 보고를 받으면서 1·21사태 작전을 보고받던 중 갑자기 물었다.

“이봐, 이 대장! 그건 됐고, 장병들 사격 성적은 어때?”

김 사령관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준비해 두었던 대원들의 최근 사격 성적을 설명하면서 덧붙였다.

“특공부대의 임무는 검거한 간첩을 회유, 역이용 접선하는 부대로서 적을 생포해야 하기 때문에 위험이 따를지라도 필사즉생 정신으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브리핑이 끝날 무렵 김재규는 “그만하면 됐어”라며 자리를 떴다. 약 1시간 후, 김 사령관을 수행했던 대공처장과 비서실장이 각각 나에게 전화를 해왔다. 김 사령관은 김교련 대공처장에게 나의 브리핑에 흡족해하며 보직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를 물었고 김교련 대공처장이 “소령 직책이지만 적격자가 없어서 대위로 14개월, 월남 1년을 다녀온 후 재보직 19개월, 총 3년 동안 많은 성과를 거양하였습니다. 월남에서 귀국 후, 전투부대를 희망하는 이 대위를 잡아 두었습니다. 이 대위가 없던 1년 동안 소령 2명이 보직하였으나 지휘통솔에 문제가 있어 부대원들을 장악 못 하고 성과도 없었습니다. 이진삼 대위는 박 대통령이 인정하는 장교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이어 중령 황인수 비서실장 역시 “15기 중 유명한 장교로서 금년 10월 1일 소령진급 예정자입니다. 앞으로 장래성 있는 장교입니다”라고 덧붙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황인수 비서실장은 내게 부대 순시 내용을 “오늘 수고 많았다. 부대 순시는 성공적이다.”라고 했다.

김 사령관은 내가 일개 대위였지만 자신이 싫어하는 윤 장군의 심복이라 생각하고 순시에 나섰으나 뜻밖에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듯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조차 “방첩부대에 간첩 잘 잡는 이진삼 대위가 있을 거요.”라고 했다는 말에 놀라지 않았을까 싶다. 어떻게 대통령이 일개 대위를 알고 있는지 또 그 대위가 어떤 인물인지 몹시 궁금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군인 본연의 임무가 아닌, 권력에 기대어 ‘해선 안 되는 일을 하고,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는 군인’이었다면 분명 보직 해임되고 타부대로 전출되었을 것이다.

1968년 4월, 김재규가 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2달이 지날 무렵 나는 3개월간의 교육 과정인 고등군사반을 지원했다. 어떡하든 이 기회에 방첩대를 떠나 일반 전투부대로 옮길 심산이었다. OBC(초등군사반)는 이미 1959년에 수료했으며, OAC(고등군사반) 수료 후 소령이 되면 육군대학을 졸업해야 한다. 육군대학은 1947년 육군참모학교로 설립된 후 1951년 대구에서 육군대학으로 정식 출범한 육군 최고의 교육기관이다. 즉 고급장교가 되는 필수 과정이다.

1968년 4월, OAC(고등군사반) 교육을 받기 위해 보병학교로 떠나는 나에게 김재규 사령관이 다가와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교육 마치고 다시 복귀하길 바란다.”

“저는 일반 전투부대에 가서 연대참모하고 대대장하겠습니다.”

 

서로 데려가려는 상관들

고등군사반은 소령이 받는 교육과정으로 나는 소령 예정자로 교육을 신청했다. 교육 기간 중 나는 20사단 사단장 윤필용 장군으로부터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아 그곳을 방문했다. 사단장실로 들어서는 내게 그는 다짜고짜 고등군사반 교육이 언제 끝나는지를 물었다.

“7월에 졸업입니다.”

내가 대답하자 윤 장군은 교육을 마치면 20사단으로 올 것을 제안했다.

“저는 다른 데 가려 합니다. 아는 분 밑엔 안 가겠습니다.”

사단장이 일개 대위에게 제안하고 일개 대위가 거절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와 윤 장군의 관계가 두터웠던 터라 가능했다. 내 말에 윤 장군은 “이 사람, 정말 고집 세네” 하더니 윤 장군은 내 말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있던 참모장 우종림 대령을 향해 “여보 참모장, 이진삼 대위 자리 하나 만들어.”라며 명을 내렸다. 내가 고등군사반을 마치자 보안부대가 아닌 보병부대 이곳저곳에서 연대참모인 연대작전주임으로 요청이 있었다. 그러자 보안사령부 인사과장 황진기 중령은 나를 보안사령부로 호출했다.

“이 대위(1968.10.1 소령 예정자), 중령 자리 비워뒀어. 그러지 말고 더 있다가 중령 되면 전투부대로 대대장 나가.”라고 권했다. 남들이야 그 좋은 자리, 힘 있는 자리를 왜 마다하느냐고 묻겠지만, 나는 ‘좋은 자리, 힘 있는 자리’보다는 야전의 전투군인이 되는 것을 원했다. 사실 당시에는 보안부대에서는 장군 되기가 어려웠고, 군인으로서의 성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많은 상급자들이 내게 “앞길이 창창한데 왜 거기에 붙어 있나, 보안부대에서 나와라.”고 말하기 전부터 나는 나갈 결심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것은 초급장교 때부터 시작 된 나의 보직에 대한 계급이었다. 거의 모두 계급보다 상위직책 보직이 장군 될 때까지 계속 됐다. 중위 중대장(대위), 대위 방첩부대 625특공대장(소령), 대위 월남 맹호부대 기동대장(소령), 대위 보안사령부 609특공대장(소령), 소령 대공과장(중령), 소령 사단보안부대장(중령), 소령 보안사령부 인사과장(중령), 중령 공수부대 참모장(대령), 대령 사격지도단장(준장) 등 위관장교 시절부터 9개 보직을 계급보다 상위직책을 수행했다. 돌이켜 보면 보람도 있었지만 숱하게 사선을 넘나들며 순간순간 아찔했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천운을 타고났다 할 정도로 숨 막히는 순간이 많았다. 만약 남들이 좋다고 하는 보직을 찾아 다녔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968년 7월 13일, 고등군사반을 졸업하고 대위인 내가 발령받아 간 곳은 보안사령부 충남 ‘507대공과장’으로 중령 자리였다. 서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검거하기 위한 보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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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07-29 23:28:20
좋은 지도자는 풍부한 경험과 강직함이 필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