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건 침투] 03 베트남 전선을 가다 Ⅰ
[목숨건 침투] 03 베트남 전선을 가다 Ⅰ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04.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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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 겪었던 6·25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열강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던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타의에 의한 남북 분단, 그리고 동족 간의 전쟁을 치른 비극이 판에 박은 듯 우리의 처지와 닮았다.

베트남 전쟁은 1955년 11월 1일에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시작됐다. 말하자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나 다름없다. 1955년 11월부터 1975년 4월까지 20년이나 계속된 이 전쟁은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합세하여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짙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군을 파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선에 총 32만여 명을 파병했고 5천여 명이 전사했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은 결국 공산주의 월맹의 승리로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당시 민주진영인 월남(남베트남)의 패망 과정이다. 군사력과 국력이 떨어져 생긴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월남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전투기 600여 대, 헬리콥터 900여 대 등을 지원받아 당시 공군력이 세계 4위에 이르렀다. 거기에 70만 병력의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정치 전쟁, 피 안 흘리는 전쟁’의 통일전선 전쟁에서 베트남 내부의 붕괴가 자초한 패망이다. 베트콩은 전쟁터에서 화상을 입어 울고 있는 베트남 어린 아이들 사진을 수도 없이 공개했다. 사진은 곧 미국 언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타전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또 세계 4위의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세계 1위 미국 공군력의 지원을 받았으나, 고지를 사수해줄 육군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베트콩의 치밀한 게릴라작전도 한몫했다.

1930년 ‘호치민’이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원과 민족해방전선의 ‘웬후토’가 양성해서 침투시킨 5만여 명의 비밀조직원 때문에 미국연합군은 곤혹스러웠다. 전체 인구의 0.5퍼센트를 차지한 비밀조직원, 말하자면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해 시민과 종교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 핵심부 곳곳에 침투하여 반미와 반전 데모를 주동하는 선동전략을 펼쳤다. 여야 구분 없는 정쟁에 사회가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졌으며 월남 내 공산월맹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정치, 언론, 학계, 종교계 등에 뿌리깊게 확산되었다. 당연히 반정부, 반전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오랜 기간 식민지를 경험해야 했던 베트남인들에게 공산월맹이 주장한 ‘민족화합으로 자주적 통일’을 이루자는 달콤한 유혹은 마음속 깊이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반정부 세력은 ‘민족화합’이라는 명분으로 끝내 미군철수를 이끌어냈다. 이후 민주진영은 공산월맹정권에 ‘무조건 항복’을 하고 만다. 정치 전쟁, 피 안 흘리는 전쟁 이른바 통일전선 전쟁에서 월남 내부 스스로가 무너진 것이다. 과거 한국이 겪은 6·25전쟁이 피아(彼我)가 맞붙어 격전을 벌임으로써 서로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의 전쟁이었다. 오히려 비전투 손실이 더 컸다.

여기서 오늘날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베트남의 공산화 과정을 직시하고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북한의 변함없는 무력적화통일 노선을 꿰뚫어봐야 한다. 북한은 개인숭배로 이루어지는 공산 독재정권의 3대 세습을 이루어낸, 지구상 유일한 곳이다. 광복 후 북조선노동당으로 시작한 북한 정권은 세계 도처에서 공산독재체제가 무너질 때, 사이비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으로 연명한 곳이다. 지난 70년간 북한에 조성된 정치풍토는 새로운 정권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는 곧 북한의 시스템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북한이 우리의 천안함을 폭침하고 연평도까지 무차별 포격을 감행하는 등 강경책을 써가면서 3대 세습을 확고히 하기 위해 광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북한의 가능한 대남정책은 핵탄두, 미사일, 장사포 등과 기타의 비대칭 무기로 우리를 굴복시키고 그들 방식의 세력 균형을 한반도에 수립하는 데에 있다.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상호방위협정도 폐기시키려 한다. 위장평화선전으로 우리 사회계층 간을 이간질해 국론을 분열시키고, 우리 정치의 현실적 약점인 여야 간 정책대립을 이용해 일관성 있는 대북안보정책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북한이 또 강행하는 것은 토착화된 고정 간첩의 은밀한 활동이다. 북한의 농락에 빠져 종북 세력이 되어 반민주, 반정부, 반미 활동에 혈안이 된 사람들은 북한 정권과 함께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들은 천안함을 폭침시킨 것이 북한의 소행이 아니며 연평도의 무차별 포격도 우리의 포사격 훈련이 빚어낸 것이라 하면서 반정부 여론을 부추겼다. 베트남의 공산화 과정과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이 복사한 듯 닮았다. 그만큼 현재 한국의 내부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내부의 적은 외부의 적에 비해서 분별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설령 분별해냈더라도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며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다져야 한다.

 

갈 사람 없으면

1965년 9월 한국군은, 베트남 전선으로 떠나기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이미 1963년 9월, 의무부대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이 파견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1964년 3월, 공병 2000여 명의 비둘기부대가 추가 파견됐고, 1965년 7월,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해 10월 22일 전투사단으로서는 처음으로 육군 맹호부대 1진이 베트남에 도착했다.

한국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은 미군이 한국에서의 철수를 운운하는 민감한 사안과 경제사정이 매우 좋지 않을 때였다. 한국은 베트남전 참전을 경제발전의 돌파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전쟁에서 다소의 희생이 있더라도 국민들이 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참전을 격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에서도 베트남전에 참전하는 장병들에게 진급과 보직의 우선권을 약속하며 독려했다. 뿐만 아니라, 브라운조약에 의해 미국 정부는 한국군의 현대화 명목으로 10억 달러를 지원하고, 파월 장병들에게는 개개인의 월급 외에 전지(戰地)수당, 전사자 보상 등의 지급을 약속했다.

내가 베트남전에 자원을 했던 것은 정부가 약속한 진급과 보직의 우선권에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공산주의로부터 자유 우방을 보호하고, 국위를 선양하고, 경제적으로 발전을 도모한다.’는 국가가 내세운 목표를 위해서였다. 특히 우리가 북한 공산군의 불법침략으로 위기에 처했던 6·25전쟁 당시 미국을 비롯한 모든 자유 우방 국가들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우리를 도와 같이 싸워 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우리와 같이 수난을 겪고 있는 우방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첫 파병 전투부대 맹호사단 방첩부대장 이상렬 중령이 갑자기 우리 특공부대장실로 찾아왔다.

“이 대위, 나와 함께 베트남 전선에 가지 않겠소?”

당시 한국군의 초급장교인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80퍼센트가 육사 출신이었다. 대대장 이상 중령은 정규 육사 출신이 아니었다. 소령까지가 육사 11기생이었다. 방첩부대에서도 베트남전 첫 파병에 20여 명의 장교가 배정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육사 출신 장교가 한 명도 없다며 나를 자극했다.

“이 대위, 우리 방첩대 요원으로 함께 갑시다!” 이 중령의 말에 “그렇습니까? 갈 사람이 없으면 제가 가겠습니다. 군인은 전쟁터에 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지요.”라며 흔쾌히 대답했다.

실제로 강원도 홍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수도사단이 파월 전투부대로 지정되자 홍천 일대는 물론 전군이 술렁거렸다. 많은 장병들이 베트남의 정글 속 전장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저는 직할 부대장입니다. 사령관님 허락을 받아야 됩니다.”

내 말에 이 중령은 큰 물고기를 낚은 어부처럼 흥분하여 윤필용 사령관이 있는 방첩부대본부로 향했다.

“사령관님, 맹호 전투부대 소대장, 중대장 80퍼센트가 육사 출신인데 방첩부대는 육사 출신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진삼 대위와 같이 가겠습니다.”

“안 돼, 다른 육사 출신 찾아봐. 이진삼은 국내에서 간첩 잡아야 한다. 지금 간첩들이 얼마나 넘어오는지 알고 있나?”

이 중령의 말에 윤필용 사령관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사령관님, 허락해주십시오! 본인이 가겠답니다.”

이 중령의 간곡한 부탁에 윤 사령관은 그 자리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확인하듯 “이진삼, 월남 가겠다고 말했나?”하고 물었다.

“사령관님, 일 년간만 다녀오겠습니다.”

이 중령이 윤필용 사령관을 설득해, 출국 며칠을 앞두고 나의 베트남 전선행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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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19-04-24 14:48:25
그런 경험이 더 좋은 군인이 되는 계기가 됐겠네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