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大統領)은 '크게 통치하는 영도자'란 뜻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낸다고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다. 역대 대통령의 권력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다. 이번 선거도 유력후보 중 당락에 따라 한 명은 청와대로, 또 다른 한 명은 교도소로 예약돼 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사전선거가 시작됐다. 닷새 뒤면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이번 선거를 계기로 대통령의 권한과 의미를 생각해 본다.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를 갖는다.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각 분야별 행정을 처리하기 위하여 법령 집행권을 가진다.각부의 행정을 지휘 감독할 권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사망했다. 향년 89세.노 전 대통령은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해 오랜 동안 병상에서 누워 있었으며, 이날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다.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한 故人(고인)은 경북고를 졸업하고 육사 11기로 군과 인연을 맺었다. 육사에서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 평생의 정치적 동지가 되었고, 후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어 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자신의 경북고와 육사 동기동창인 김복동의 여동생 김옥숙 여사와 결혼한 故人(고인)은 육사 졸업 후 육군 보
第1, 2, 3 땅굴에서 確認(확인)한 바와 같이 北傀(북괴)는 全(전) 前線(전선)에 걸쳐 71年末(년말)부터 땅굴을 掘設(굴설)하기 시작하여 76年末(년말)까지 集中的(집중적)으로 工事(공사)를 實施(실시)해온 것으로 判斷(판단)됨으로 앞으로 探査活動(탐사활동)은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 남쪽 1km 以內(이내) 地域(지역)에 集中(집중)할 必要性(필요성)이 要求(요구) 되었으며, 豫想(예상) 軸線(축선)도 正確(정확)한 入口(입구) 地点(지점)을 再確認(재확인)하고, 이 地域(지역)에 이르는 基点(기점)이 될 만한 地形(지형)을
YS는 안 됩니다6공화국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노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은 후계자였다. 이전인 1990년 1월 22일, 여소야대의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JP(김종필 총재), YS(김영삼 총재), TJ(박태준 최고위원)가 3당 통합을 한 후부터 이어진 고민이었다. JP는 젖혀 두고 YS냐, TJ냐를 따졌다. 한번은 내게 의중을 물어오기에 “YS는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는 YS의 측근인 최형우 정무장관이 나를 찾아와 “이 형, 도와주세요. 대통령께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우리 집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사
더불어민주당 김종남 유성을 예비후보가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 함께 했던 관계자와 1987년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세대를 중심으로 한 120명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경선을 대비한 막판 총력전에 나섰다.이들은 지지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고 부패하고 무능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맞서 촛불을 들었던 평범한 시민들이라”면서 “대전에서 유일하게 현역의원과 경선을 진행하는 여성정치신인 김종남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혁신공천의 성공이라”며 김 예비후보 지지를 표명했다.이날 지지선언문을 낭독한 노민정(20)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활성화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어 제일 먼저 내건 목표는 전국 각지의 생활체육 활성화와 청소년 육성 시설의 확대가 절심함을 느꼈다. 게이트볼 등 체육시설 10개가 노인병원 20개의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재는 생활체육협의회를 대한체육회가 합병하여 관리하고 있다. 당시는 국위를 선양하는 올림픽을 위한 대한체육회를 필두로 한 엘리트 체육과 국민생활체육협의회를 활성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각 지방 단위로 청소년 훈련 시설과 일반 국민의 생활체육 활성화에 대한 수요를 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사령관님, 땅굴 각도가 잘못됐습니다.”현장 작업에 참여했던 업체에서 적외선 빔을 잘못 건드려 각도가 위를 향한 바람에 아래로 뚫어야 하는 땅굴이 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다시 밑으로 꺾기 위해서는 다른 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조치할 수 있나, 박 장군!”나는 박 장군의 눈빛을 보며 물었다.“네, 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할 수 있다는데 다른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염려 마라. 불가능은 없다. 최선의 방책을 강구하자.”나는 무엇이든 일단 맡기면 그것으로 끝이다.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불가능은 없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성공의 근본이다.-이진삼배경“하나의 갱도(땅굴)는 열 개의 원자탄보다 낫다. 1975년 10월 10일까지 관통, 노동당 창설 30주년까지 전방 지역에 요새화된 적의 진지를 무력화시켜라.”1971년 9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땅굴 굴착 전투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곧 요새화된 남한의 훼바, 알파, 브라보, 찰리 등을 자신들이 판 땅굴을 통해 1시간 내에 8km 이상을 강행 돌파함으로써 우리의 주 병력이 진지 FEBA(전투지역의 선단) 점령 전에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은 1
진위(眞僞) 구별법1989년 4월 6일, 참모차장의 자리에 보직된 지 9개월 만에 노태우 대통령은 나를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그러면서 서부전선인 용인의 3군사령부로 발령을 내겠다고 했다. 나는 서울 인근에 있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원주에 있는 1군사령부는 산악3군단과 21사단이 휘하에 있다.“정호근 장군은 임기가 다 됐으니까 1군으로 제가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3군사령부는 간 지 4개월밖에 안 됐으니까 보류하시는 게 좋겠습니다.”그때 만약 내가 노 대통령의 뜻대로 3군사령관으로 부임해 갔다면, 앞선 사령관은 임기 전에 옷을 벗어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1988년 1월과 2월,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연희동 자택으로 나를 불러, 보안사령관직을 맡을 것을 두 번에 걸쳐 권유했다.“저는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 제가 보안부대 8년, 정보사령관 2년, 10년간이나 정보계통에 있었습니다. 저는 야전(전투) 지휘관 하겠습니다.”“박준병 장군 보안사령관 했는데 후에 어떻게 되었지?”“1979년 10·26 때 20사단장으로 서울 태릉으로 출동했다가 보안사령관 끝내고 예편, 민정당으로 충북 보은·영동·옥천군 국회의원을 하고 있습니다.”“안필준 장군은?”“6군단장 끝내고
산악 3군단장★★★1987년 1월 13일, 중장으로 진급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서울 거여동에 있는 공수특전사령관으로 내정했다. 나는 참모총장을 방문하여 말했다.“저는 9공수참모장과 9공수여단장을 했습니다. 전방 군단장으로 보내주십시오.”“어제 대통령께 결재 올리면서 결정했는데 어떡하나?”“총장님, 고생은 되겠지만 저는 많은 병과를 지휘 통솔하는 정규 군단장을 하겠습니다. 보병, 포병, 공병, 기갑, 통신 등 정규 작전 부대를 지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21사단과 12사단 지역 땅굴을 발견하겠습니다.”“정 그렇다면, 전화로 보고하
남조선 최고의 악질내가 초급장교인 대위와 소령 시절 많은 적을 잡은 내용이 언론에 노출된 후, 장군이 되어 전방 지휘관으로 보직될 때마다 북괴는 확성기 방송을 통해 노골적으로 ‘남반부 장병을 괴롭히는 이진삼’이라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장병들도 대응방송을 했다. 휴전선에서는 북한군이 종종 아군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사단장인 내가 책임지겠다.’며 몇 십 배의 대응사격으로 북괴군의 기를 꺾어놓았다. 1988년 1월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전금철은 평양에서 가진 내
서울의 봄1980년 봄, 소위 ‘서울의 봄’이라 일컫던 분위기는 점점 냉정을 잃어갔다. 1980년의 봄은 5·17 계엄령 확대로 이어졌다. 당시의 국내 상황을 안일하게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관계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만 부르짖었지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정치인들은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혼란을 가중시킬 뿐 수습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진급심사대령 진급심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심사위원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화로 여기저기서 알려왔다. 위원장 양원섭 소장을 비롯하여 전두환 준장, 김재명 준장, 우종림 준장, 나동원 준장, 김영동 준장, 배성순 준장 등 7명의 장군이 심사위원이었다.진급발표 후 감찰감 양원섭 장군 방에 차규헌 소장, 전두환 준장 셋이 모여 전화로 나를 불렀다. 진급심사위원장이었던 감찰감 양원섭 장군이 말문을 열었다.“이 중령, 내가 대령 시킨 거 아니야. 이진삼 기록카드를 들고 모든 위원들이 진급시켜야 한다고 해서 제쳐 놓았어. 만약 안 되면
버티고 살아남다“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15사단에서 13개월이 지날 무렵, 1974년 4월부터 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버티고 살아 있으니까 서울 육군본부의 장군, 대령 선배들이 ‘이진삼을 빨리 서울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진급시켜야 한다’는 소식이 전방까지 들려왔다. 대령이 되어야 하는데 15사단의 부연대장으로는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7사단, 15사단, 27사단과 군단까지 대령 진급 해당자들이 40여 명이었다. 부연대장으
노란 편지의 의미삶이란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더러 맴돌기는 하지만 한 자리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갈 수밖에 없다.1973년 3월 23일, 윤필용 사건으로 15사단 부연대장으로 쫓겨 가기 일주일 전 일요일 오후, 8사단 박노영 사단장은 주말을 빌어 전방으로 온 우리 가족을 관내인 산정호수 근처 조용한 식당으로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사단장이 대대장 가족을 불러 식사하는 예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 자리에서 박 사단장은 내게 “서울 소식을 들었나?” 하고 물어왔다. 못 들었다고 대답하자 윤필용 사건을 알려주었다.
칼자루 쥔 강창성육사 8기 윤필용 장군과 동기생 강창성 장군의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평상시 표면화되진 않은 상태였다. 많은 선배와 후배들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갔다. 윤 장군과 친할수록 더욱 그러했다. 윤 장군이 아끼던 육사 11기 권익현(보안사), 손영길(수경사참모장)을 비롯하여 12기 정동철(보안사), 이광근(보안사), 13기 황진기(보안사 인사과장), 신재기(육본진급과), 14기 배명국(보안사 인사과장), 박정기(수경사 비서실장), 그리고 15기인 이진삼(보안사 인사과장)을 포함했다. 이 사건으로 총 8명이 전역조치 되었
저희 대대는 이 없습니다5군단장이 8사단 1개 대대를 순시하겠다고 사단에 지시하였는바 8사단에서는 21연대 3대대를 순시하도록 보고했다. 모자와 양 어깨에 번쩍번쩍 하얀 별 3개씩 총 9개의 별을 단 그 이름도 무서운 유병현 군단장이 차에서 내렸다.나는 부대대장, 중대장 참모들과 도열하여 경례하고 군단장을 안내해 대대장실로 향했다. 군단장은 대대장실 입구에서 영접하는 사단장 박노영 준장, 연대장 노태우 대령과 악수하며 인사했다.빈약한 토막사 대대장실에서 브리핑을 받던 군단장이 갑작스레 취사장으로 향했다. 군단장은 취사병들의 사타구니
8사단 21연대 3대대장1972년 1월 27일, 8사단 21연대 3대대장으로 부임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경기도 포천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처음 부대에 도착해 파악한 것은 병사들의 훈련 상태였다. 지휘 방침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늘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처럼 병사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첫째도 임무, 둘째도 임무, 셋째도 임무였기에 임무수행을 위한 병사들의 훈련 상태를 강조했다.전투의 3대 필수 요소가 정신, 체력, 전투기술이다.부대는 무엇보다 초급간부인 분대장, 선임하사, 소대장, 중대장에게 달려 있다. 한번은 소대장들의 BOQ(독
샛길에서 나와때를 기다렸다. 내 꿈은 전투부대 전투군인으로 기회만 살피고 있었다. 남들은 그 좋은 부대를 왜 나오려고 하느냐고 하지만, 내 길은 원래 그 길이 아니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방첩대에서 특공대장, 파월 기동대장, 부대 대공과장, 사단 보안부대장, 보안사령부 인사과장까지 7년의 기간은 샛길이었다. 화려한 버섯일수록 독을 품고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자리는 내게 있어 화려한 독버섯에 지나지 않았다. 1970년 10월부터 2년 예정인 직책을 사령관에게 사양하고 1971년 8월 10개월 보직을 끝으로 보안사령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