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불가능은 없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성공의 근본이다.
-이진삼
배경
“하나의 갱도(땅굴)는 열 개의 원자탄보다 낫다. 1975년 10월 10일까지 관통, 노동당 창설 30주년까지 전방 지역에 요새화된 적의 진지를 무력화시켜라.”
1971년 9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땅굴 굴착 전투 명령을 하달했다. 이는 곧 요새화된 남한의 훼바, 알파, 브라보, 찰리 등을 자신들이 판 땅굴을 통해 1시간 내에 8km 이상을 강행 돌파함으로써 우리의 주 병력이 진지 FEBA(전투지역의 선단) 점령 전에 선점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북한은 1972년 초부터 전 전선에 걸쳐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실제로 귀순자 다수의 목격과 득문 사실이 제보되었다. 북한은 표면적으로는 남북대화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땅굴 굴착 활동으로 우리를 기만했다. 예나 지금이나 북한 공산집단은 조금도 변한 게 없다.
○○○ 지역 탐지 활동
내가 21사단장에 부임하기 전까지, 육군의 탐지 방향은 서부전선에 집중되었고,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21사단지역 갱도 탐지 활동에 대한 상급 부대의 관심은 저조하였다. 당연히 사단 장병의 탐지 의욕 또한 저하되어 있었다. 나는 전 장병에게 사단 지역 내 적의 땅굴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주며 갱도 탐지 업무 활성화를 내세웠다.
연중무휴 작업과 주야간 작업을 하는 대신 인력은 3배 이상 보충하도록 했다. 혹한기 난방 시설을 포함 특식을 제공하도록 명령하는 등 최고의 관심 지역화 하였다. 우선은 지금껏 시추한 후 방치하고 있는 시추공들을 정비하여 관찰하도록 했다. 시추공이 흙으로 덮이면 그 안에서의 변화, 수위 변동 등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군본부를 방문, 산악지형인 동부에 시추기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매주 일요일 오전에는 2개 시추 지역을 방문, 독려하면서 사기를 앙양시켰다. 그 다음으로는 청음 집중 분포 지역인 ○○○와 ○○○ 2개 지역을 중점으로 시추하도록 했다. DMZ 및 철책선 근무요원의 관측 및 청음 활동을 강화하는 한편 적의 예상출구에 대한 수색도 철저히 실시하도록 하였다. 시추 간격을 10m 이내로 좁히고, 시추공 심도를 증가하는 한편 청음요원의 교육과 전방 지역 주민 홍보도 실시했다. 청음 분석 자료를 참고하여 비교 분석, 탐지일지를 기록함으로써 청음 시간과 횟수를 그래프로 만들어 분석했다. 상세한 내용은 보안상 책자에 기록을 유보하겠다.
꾀꼬리의 암시
군단장인 나는 1987년 7월 말 일요일 오전 10시, 그날도 나는 병사들을 격려차 시추지역을 방문했다. 21사단장, 66연대장, 작전주임, 정보주임, 땅굴팀장 등과 토의를 하던 중 북방 50m 높은 지점에 노란 꾀꼬리 한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었다. 나는 사단장과 연대장을 향해 “저 새 참 아름답지?” 했더니 연대장은 바로 “그렇습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동안 시선을 꾀꼬리에 고정시켰다. 2~3분 정도가 지났을까, 꾀꼬리가 가칠봉 정상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꾀꼬리가 앉았던 곳으로 가파른 경사를 따라 올라갔다. 꾀꼬리가 앉아 있던 곳은 1984년도에 굴착했던 14번째 시추공 지점으로 잘 관리되어 있었으며 지속적인 청음 활동으로 미상 모터 소리를 육청하여 결정적 징후를 포착했던 곳이다. 그러나 당시 갱도 관계 실무자들이 원점에서부터 땅굴 예상 분석에 다소 오차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나는 14번째 시추공 지점의 인근 지역을 정밀 시추공 작업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7월 우기로 땅이 젖어 있어 매우 질퍽거렸다. 시추기를 옮기기에는 경사로 작업이 필요했다. 전 병력을 동원하여 3시간 동안 마대에 흙과 자갈을 혼합, 통로를 개척하고 74m 북쪽 전방으로 시추기를 옮겼다. 시추 깊이 증가로(120m→150m) 어려움은 있으나 적의 갱도 입구에 접근할수록 발견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땅굴에 적중하기까지
군사령관인 나는 꾀꼬리의 출몰 위치 근처 지점에서 1989년 8월 말, 14번 시추공 지역에서 소리를 포착, 이것을 분석한 결과 모터 음으로 판정하고, 야전 청음 분석차량(MLV)을 추가 배치 운용했다. 10월 말에는 과학기술연구소 CW장비로 7개의 시추공 지역을 탐사한 결과 근처 14m 지점에 미세한 지층 변화를 발견했다. 드디어 적의 땅굴에 적중시키기 위한 관통 작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곧 찾을 것만 같았던 땅굴은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첫 번째 시추공부터 빗나갔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시추공까지 빗나갔다.
1989년 12월 24일, 여섯 번째 시추공 작업에 들어갔다. 드디어 대통령과 약속한 대로 군사령관 부임 8개월 12일 만에 결과가 나왔다. 시추 슬라임(slime) 및 물이 지상으로 분출되지 않고 지하로 빠져나갔다. 시추기 압력 게이지가 떨어지면서 시추기 로드가 가볍게 낙하했고 동시에 시추기 해머 타격 소리가 약해지면서 시추공을 통하여 공기가 분출되었다. 마침내 4~6번 공이 적의 땅굴에 적중한 것이다. 시추공에 카메라를 달아 투입하니 레일(rail), 침목, 쇠파이프, 벽면에 빨간 페인트의 ‘조국통일, 수령님 만세’가 보였다. 시추 지점으로부터 불과 남쪽 22m 지점에서 적 땅굴 막장이 끝나는 것을 확인했다. 남방한계선까지 2,052m를 파 내려왔다. 기존 시추 지역에서 과감하게 74m를 추진하여 시추공 탐사를 하지 않았다면 1989년 12월 24일 01시 29분 크리스마스이브에 제4땅굴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목표는 달성하기 어려우나 위대한 것이다. 노력 앞에 불가능은 없다. 수많은 역경과 고충이 닥칠지라도 이를 극복해내고야 말겠다는 노력의 결실이다. 그 무엇(질책과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땅굴 발견의 소원이 성취되었으니 훌륭한 휘하 장병들에게 공을 돌리고 싶다. 말보다는 실천, 계획보다는 결과다.
소탕작전 준비
제4땅굴 발견과 함께 중요한 것은 적의 역(逆)대책에 대비하는 일이었다. 갱도 내부 감시 방책을 강구하는 한편 정확한 예상출구의 판단과 철저한 수색을 실시하고, 장애물 설치 등 북괴의 선제공격에 대비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하였다. 무엇보다 이전의 제1, 제2, 제3 땅굴의 소탕작전 중 있었던 인명 피해 교훈을 세밀히 분석하도록 했다. 예상 가능한 모든 상황을 염출(捻出), 이에 대비한 방책을 수립하여 단 한 건의 피해도 없이 완전 작전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1990년 1월 1일에 장군이 되어 6군단 참모장으로 내정된 육사 23기 박영익 준장을 21사단 부사단장으로 발탁하여 땅굴 소탕작전 지휘관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박영익 준장을 필두로 소탕작전에 투입할 6개 팀을 편성하였다. 상부에선 특전사 요원의 투입을 고려하였으나, 나는 사단장 시절 강력히 훈련시킨 21사단 수색대대 투입을 결정하고 훈련에 들어갔다. 2개월 이상 강도 높은 훈련은 상상을 초월한 훈련이었다. 체력단련은 물론 특수 장비 사용 요령에서부터 화생방 대비훈련을 했다. 또한 갱도 모형 훈련장을 설치해 소탕작전 요령과 우발 상황에 대한 대처 요령, 모래포대 운반, 담력, 극기 훈련을 포함 37개의 상황 대비책(case study)을 훈련하였다.
강원도의 폐탄광을 이용, 터널 안에서 적 소탕 훈련을 했다. 단 한 명의 낙오 병사도 없었다. 철저한 보안 대책으로 땅굴이 공개되기 전까지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사령관 승인 없이 상하급 부대 지휘관과 참모들의 현지 방문을 통제하였다. 이는 갱내를 감시하기 위해 투입했던 미 시추공 카메라로 적의 활동 사항을 분석한 결과, 관통 수 시간 전까지도 적은 땅굴 노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했다. 역갱도 관통일을 1990년 3월 5일로 정하였다. 역갱도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1990년 2월 24일, 서울 <세계일보>에 “대한민국 동부전선 땅굴 발견”이라는 기사가 미국 <워싱턴 타임지> 인용으로 보도되었다. 즉시 언론 보도 통제를 하는 한편 적의 주의를 타 지역으로 돌리도록 기만대책을 강구했다. 인접 군단을 포함 전 전선에 병력 및 헬리콥터 운행 등 기만작전을 실시하였다.
나는 박 준장에게 날짜를 앞당겨 3월 3일 이전에 관통하도록 준비시켰다. 3월 5일에 관통을 하게 되면 만약에 있게 될 적의 도발에 희생이 따를 것을 염려해서였다. 나는 육군본부와 국방부에 3월 3일, 2일 앞당긴 관통 건의를 하였다. 하지만 육군본부와 국방부는 이미 내외신 기자 40명, 중립국 감시단 8명에게 통보를 했고, 대통령에게 보고가 된 터라 안 된다며 3월 5일에 관통하도록 했다. 군사령관인 나는 직접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역갱도 관통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적의 역대책이 우려됩니다. 3월 5일 계획을 2일 앞당겨 관통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은 즉시 국방부 장관에게 “이진삼이 하자는 대로 해. 이진삼은 불가능이 없어. 3월 3일로 앞당겨!”라며 명령을 내렸다. 대통령의 지시대로 관통일은 3월 3일 오후 1시로 확정되었다. 그런데 관통을 며칠 앞두고 현장에 있던 박 준장이 장화를 신은 채 헐레벌떡 달려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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