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목숨건 침투 - 12 3군단장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목숨건 침투 - 12 3군단장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12.0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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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산악 3군단장

★★★

1987년 1월 13일, 중장으로 진급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서울 거여동에 있는 공수특전사령관으로 내정했다. 나는 참모총장을 방문하여 말했다.

“저는 9공수참모장과 9공수여단장을 했습니다. 전방 군단장으로 보내주십시오.”

“어제 대통령께 결재 올리면서 결정했는데 어떡하나?”

“총장님, 고생은 되겠지만 저는 많은 병과를 지휘 통솔하는 정규 군단장을 하겠습니다. 보병, 포병, 공병, 기갑, 통신 등 정규 작전 부대를 지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21사단과 12사단 지역 땅굴을 발견하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전화로 보고하는 건 그렇고 내가 청와대 가서 보고 드리고 결정하겠다.”

참모총장은 대통령께 보고했다. 대통령은 오히려 칭찬하면서 “이 장군 3군단 예하부대인 전방 사단장을 했지요. 군인으로서 그게 정상이야. 본인 희망대로 보내줘요.”라며 수락했다. 이에 참모총장은 2년 선배인 13기의 육완식 장군을 공수특전사령관으로 내정하였다. 특전사령관이나 수방사령관, 정보사령관 등 재경 부대장의 보직은 일단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는 것이 관례다.

내가 험한 21사단 그리고 산악군단인 3군단을 자처해 나간 것은 한국적인 지형에서의 전투지휘관 경력을 쌓기 위함이었다.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찾지 못한 땅굴을 발견하겠다는 의지를 참모총장에게 말했다.

그 후 나는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야전성이 충만하고 유능한 장교들을 험한 부대에 배치했으며, 전방을 경험한 장군들을 육군본부 참모부장으로 보직시켰다. 우수 간부들의 격오지 우선 보직은 전 육군의 사기앙양과 더불어 전투력 증강에 크게 기여하였다.

 

철정 과학화 훈련장

3군단은 강원도 원통, 설악산과 한계령 쪽 강을 따라 합강에서 12㎞ 동남쪽에 기린면 현리라는 곳에 위치해 있다. 전방 GOP사단으로 사단과 사단이 있고, FEBA사단이 있다.

군단장으로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가졌던 생각은 실전 경험이 없는 우리 군의 전투 수행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훈련방법을 시험하는 일이었다. 과학화한 사격장과 훈련장이 절실했다. 3군단 현리 지역의 서남방에 위치한, 사격장과 훈련장으로 적합한 곳을 찾아냈다. 전국에서 그러한 지형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터라 나는 그곳에 훈련장을 만들도록 육군본부에 건의했다.

첨단 장비와 시스템을 구축해 과학화한 훈련장을 만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땅을 매입하고 훈련시설을 구축해야 하는 절차들이 녹록치 않았다. 다행히 군단장을 마치고 참모차장이 되어서 겨우 예산을 확보해 땅을 매입할 수 있었다. 애초에는 그곳에서 포까지 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으나 포를 쏘기 위해서는 10㎞ 이상의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데 그만한 땅을 매입할 예산확보가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그 지역을 관장하는 군단장, 참모차장, 1군사령관, 참모총장을 했기 때문에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비록 포는 쏠 수 없지만 우리나라가 선진화된 훈련장을 갖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현재 그곳은 ‘철정 과학화 훈련장’이란 이름으로 실전 경험이 없는 우리 군이 실전을 방불케 하는 전투훈련을 함으로써 전투준비태세 완비에 큰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를 둘러본 외국의 많은 군 관계자들은 선진화된 우리 훈련 시스템을 높이 평가했다. 군 임기 중 해낸 보람 있는 일 중의 하나다.

 

노태우 후보의 고민

“방법이 없을까? 정승화 참모총장과 친분이 두터운 사람을 보내 정 총장이 김영삼 후보 지원 유세를 않도록 해야겠다.”

1987년 6·29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서 집권당인 노태우 대통령 후보와 전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졌다. 3군단장 시절 외출 나온 내게 연희동 노태우 후보 집에 들르라는 연락이 왔다. 나를 본 노태우 후보는 하소연했다. 김대중, 김종필과 함께 대통령 후보에 나온 김영삼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후보 김영삼 때문이라기보다는 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김영삼 후보 선거를 돕고 있는 전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때문이었다. 7년여 전 10·26과 12·12로 맺힌 게 많다 보니 김영삼 후보 편에 선 것이었다. 말릴 방법이 없다고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니다 싶었다. 만약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찾아가면, 정 총장이 큰 소리 한 번 치면 말도 못 붙이고 돌아올 게 뻔하다고 생각한 나는 “악역 할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바른말 하고, 정 총장 입장과 약점을 알고, 미래지향적인 진실한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적격자를 찾아보시죠.”라고 건의했다. 내 말에 노 후보는 “찾을 것도 없겠네. 그런 거라면 이 장군이 적격이지. 내가 이 장군 부른 이유가 있어. 마침 여기 왔으니까 잘됐어. 이 장군, 그분한테 점수 딴 거 있잖아. 이 장군이 총대 한번 져보지그래.”라고 의중을 물어왔다.

직감으로 내가 염두에 둔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재 군인인 ‘나’와 과거에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그에게서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설득을 통해 조용하게 해결하는 일이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이외의 생각들은 할 것도 없었다. “알겠습니다.”라는 대답과 함께 밤 8시에 정승화 총장 집을 찾아갔다.

“인사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총장님. 저 장군 시켜주셨죠. 저의 동기생 3명을 처음으로 진급시켜 주셔서 오늘이 있게 해주셨습니다. 은혜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총장님, 제가 총장님 수행부관 이재천과 수석부관 황원탁을 살려준 거 아십니까?”

“그럼, 들어 알고 있지.”

“이재천 소령은 제가 대대장 때 소대장으로 데리고 있었습니다. 구속하고 군법회의에 회부시키겠다고 하는 것을 제가 말렸습니다. 총장님 신변을 보호하는 부관이 도망갔다면 처벌해야 하지만, 경호 차원에서 한 행동은 부하로서 정당한 행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육군대학에 보내고 중령 시켰습니다. 앞으로 장군도 시키겠습니다. 황원탁 장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시키겠습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래, 알지.”

“그리고 섭섭한 것이 있습니다. 육사 나온 아들, 정 중령 말입니다. 인제군 원통, 서화면 천도리에서 포병 대대장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면회 오시면서 어떻게 군단장인 저한테 연락도 하지 않고 다녀가십니까? 섭섭합니다. 3군단장 출신이신 총장님은 저에게는 연락을 주셔야지요.”

“여보, 이 민감한 시기에 내가 연락하면 이 장군 입장이 곤란해질 것 같아서 연락 않고 살짝 다녀왔소. 미안하오.”

“총장님, 제가 어디 눈치 보며 사는 사람입니까. 아들 정 중령 앞으로 제가 돌보겠습니다. 그러니 김영삼 후보 손 흔들고 지원유세 하지 마십시오. 3년 후, 5년 후를 생각하십시오. 후회할 일 하지 마십시오. 김영삼 후보, 이번에 당선되지 않습니다. 내일부터 안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 말씀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내 말에 정승화 총장은 잠시 눈을 감고 고민을 하다가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에게 “여보, 어떻게 생각해?”라며 의중을 물었다.

“이 장군 말대로 하세요.”

정승화 총장은 아내의 말이 끝나자 “이 장군과 약속하겠네.”라며 강경한 어조로 수긍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올려 거수경례를 했다.

“존경하는 총장님, 훌륭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그 길로 나는 연희동 노태우 후보 집에 들러 자세한 보고를 했다. 밤 10시, 흥분한 노 후보는 청와대 전두환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렸고, 전 대통령이 전화를 바꾸게 해서 요약해서 그대로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내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이진삼 대단해, 오늘은 늦었고 다음에 외출 나오면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다.

노 후보는 1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8년이나 지난 그날의 일을 꺼내 놓는 이유는 하나다. 국가안보를 생각했다. 대통령은 군의 통수권자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라가 망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표현처럼, 다른 군인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정치군인이고, 내가 관여하는 것은 ‘정의’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때 내가 가졌던 생각은 혼란을 막고자 했을 뿐이다. 다시 똑같은 상황이 주어져도 나는 또 그대로 할 것이다. 내게 어떤 득실이 있을지를 따지기에 앞서 군인으로서 소신껏 생각한 일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다른 사람은 듣고서 알았다고 고개만 끄덕일 일에 나는 당당하게 나섰다.

정보부대에 오래 근무하면 진급이 어렵다는 관례를 깨고 내가 일찍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몸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고, 대공 분야에서 죽지 않고 최선을 다한 것을 국가가 인정해준 것이다. 보안사령부는 정보요원, 보안요원, 대공요원, 통신요원, 군수요원, 행정요원 등 업무가 다르다. 나는 대공 분야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훗날, 나의 국가에 대한 충정이 ‘짝사랑’이 된 것은 유감이지만, 그럼에도 국가에 대한 나의 사명감은 여전하다.

 

골프 예찬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취미생활로 낚시나 바둑, 장기 등을 하지만, 나는 태생적으로 앉아서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적인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사격, 태권도, 테니스, 골프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테니스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로 사단장 시절인 46세에 정구병과 단식게임을 할 만큼 잘 쳤다. 실력의 전성기였다. 체육관계 부대 근무와 장관을 하게 된 동기가 운동 취미와 소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골프는 다른 운동에 비해 위험한 운동이 아니다. 필드를 오래 걸어 다니는 것은 체력단련에 많은 도움이 된다. 외국의 경우, 골프장을 많이 만들어 놓기 때문에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지만 골프 또한 일단 도취되면 다른 운동은 성에 차지 않는다. 골프는 우리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1번 홀에서 18번 홀까지 가는 동안에 준비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잘 될 때도 있고, 기대 이하로 잘 안 될 때도 있다. 특히 미스 샷(잘못 친 공)이 발생하면 점수를 많이 잃는다. 그래서 기복이 심하면 안 된다. 파, 파, 파 나오다가 트리플이 나오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진다. 나는 상대방의 스코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즐기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산도 보고 물도 보고 자연의 조화 속에 녹아들어 간다. 동반자 중에는 다른 사람의 스코어를 두고 파냐 보기냐 말이 많다. 나는 다른 사람의 스코어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나이 많다는 이유로 핸디를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게임도 좋지만 자연과 어울려 두루두루 함께하는 재미가 더 좋다. 골프는 더구나 단번에 잘 칠 수가 없다. 차근차근 해야 무리가 되지 않는다. 삶에 절차가 있듯 골프를 하는 것도 단계를 밟아야 한다. 왜냐하면 골프를 한다는 것은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골프와 사격, 궁도 등은 심장이 튼튼해야 한다. 마음의 안정을 필요로 한다. 축구나 농구, 야구 등의 구기 종목은 여럿이 함께하는 운동이지만, 골프와 사격, 궁도 등은 홀로 하는 외로운 싸움이다. 남이 얼마를 치든 말든 자기와의 싸움이다. 내 할 일을 잘 하는 게 우선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자기 점수보다 남의 점수에 관심이 많다. 나는 남이 잘 치면 ‘굿 샷’을 힘껏 외친다. 내가 잘 돼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잘 쳐서 유쾌하면 나도 기분이 좋다. 내 삶은 항상 직선이다.

내가 사단장을 하고, 군단장을 하게 된 것 등 모든 것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무게에 견주어 과분한 혜택을 받았다. 계급으로 말하면 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대위 때 중대장 아니면 중령 때 대대장으로 전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면서 중령 정도를 나의 최고 목표(내가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 아닐까)로 하고 있었던 내 과거의 소박한 꿈과 파란만장했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짧은 군의 여정을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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