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

1988년 1월과 2월,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연희동 자택으로 나를 불러, 보안사령관직을 맡을 것을 두 번에 걸쳐 권유했다.

“저는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 제가 보안부대 8년, 정보사령관 2년, 10년간이나 정보계통에 있었습니다. 저는 야전(전투) 지휘관 하겠습니다.”

“박준병 장군 보안사령관 했는데 후에 어떻게 되었지?”

“1979년 10·26 때 20사단장으로 서울 태릉으로 출동했다가 보안사령관 끝내고 예편, 민정당으로 충북 보은·영동·옥천군 국회의원을 하고 있습니다.”

“안필준 장군은?”

“6군단장 끝내고 보안사령관 하고, 1군사령관을 끝으로 전역해 청소년연맹 총재로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보안사령관은 남 보기에 좋은 보직이라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장군들 중 반은 성공적으로 하지 못해 후평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을 권하면 나름대로 보안사령부를 쇄신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보안사령부 근무를 바탕으로 대간첩, 대태업, 대전복 활동과 과거의 낡고 썩은 고질에서 벗어나 멋있게 하겠다는 각오를 했었다.

대통령에 취임한 노 대통령은 나를 육군참모차장으로 임명했다. 중장 중 가장 서열이 빠른 직책이다. 1988년 7월부터 1989년 4월까지 9개월을 근무했다. 중장 27개월 만에 별 넷의 군사령관 대장 자리에 앉게 된 셈이다. 지나고 생각하니 만약 내가 보안사령관을 보직 받았다면 9개월 만에 대장 달고 군사령관 보직은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중장은 차관급이고 대장은 장관급이다. 중장부터가 정무직이다. 따라서 정무직인 중장과 대장은 공석이 생기면 언제든지 진급시킬 수 있다. 중장이 된 지 1년 됐어도 대장 공석에 따라 대장 자리에 보직하면 대장으로 진급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빠르면 직책이 중장, 대장이라도 소장, 중장 계급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위관장교와 영관장교는 전투 시에는 임시 계급을 줄 수 있으나 평시에는 불가능하다.

 

ROTC 1기 박세환을 살리다

“백담사 전두환 전 대통령을 방문한 12사단장 박세환 소장과 3군단 보안부대장 한길성 대령, 두 장교를 해임시키시오.”

1989년 3월 말, 노태우 대통령은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차 청와대를 출발하면서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에게 명했다. 육군참모총장에게 전달하라는 지시였다.

사실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2월 25일에 6공화국 출범과 함께 ‘5공 청산’이란 문제를 떠안아야 했다. 더구나 같은 해 4월 26일에 있었던 총선에서 너무 많이 당선될까 걱정할 정도의 분위기를 뒤집고 여소야대의 정국을 맞이해야 했다. 겨우 87개 의석을 차지하였다. 전국구 의원 38명을 포함해 125석으로 과반수에는 25석이나 미달이었다. 시작부터 노 대통령은 연합합당을 검토할 수밖에 없었다.

1988년 5월 12일, 민주당은 전당대회를 열어 대선패배의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났던 김영삼 전 총재를 다시 총재로 추대했다. 김 대표는 5공(共) 청산을 명분으로 노 대통령과 전 전 대통령을 강하게 옥죄었다.

1988년 11월 2일, 5공(共) 청문회가 시작되었고, 그 결과 전 전 대통령은 백담사행에 올랐다. 이후 그곳을 박세환 소장과 한길성 대령이 다녀온 것이 노 대통령 귀에 들어갔다.

1989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저녁 6시 청와대로 돌아온 노 대통령은 참모총장으로부터 인사보고를 받지 못하고 퇴근하였다.

같은 날 저녁 8시, 보안사령관이 나를 찾아와 느닷없이 “저 좀 살려주십시오. 일이 생겼습니다.”라며 두 장교의 백담사 방문을 설명해주었다. “보안사령관,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라며 자리를 별실로 옮겨 영부인 김옥숙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갑작스러운 전화에 김옥숙 여사는 “무슨 일 있어요?”라며 놀라는 목소리였다.

“12사단장 박세환 장군과 3군단 보안부대장 한길성 대령, 두 장교가 백담사를 찾아 갔다는 보고를 방금 받았습니다. 사실입니까?”

“네, 사실이에요.”

“지금 제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까바친 걸로 소문났습니다.”

“언제 이 장군님이 그러셨어요? 그리고 이 장군님이 왜 오해를 받아요?”

“그러면 어떻게 된 겁니까?”

정색을 하며 되묻자 영부인이 얼결에 정황을 설명했다. 국방부 이상훈 장관이 부인을 시켜 영부인에게 이야기한 것을, 영부인이 노 대통령에게 전했던 것이다.

“그러면 제가 곤란합니다. 제가 지금은 참모차장이지만 지난번에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제가 군을 장악해야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아끼는 ROTC 장교들을 자르면 앞으로 누굴 데리고 군을 장악하겠습니까. 1987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인계 2개월 전, 해서는 안 될 대장 인사를 하고 떠나는 바람에 입장이 곤란했는데 오늘 같은 내용이 또 전 국민에게 알려지면 무슨 창피한 일입니까. 다시 말씀 드리면 첫 번째, 제가 까바친 것처럼 되었고 두 번째는 제가 어떻게 군을 장악하며 세 번째는 국민이 알면 체통이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박세환 소장이 백담사를 찾아간 이유가 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이 사단장 할 때 대대장 했고, 대통령 할 때는 안보비서관 하지 않았습니까.”

“네, 알죠. 그래도 시기가 너무 민감합니다.”

“이렇게 처리하시면 곤란합니다.”라는 내 말에 영부인은 “그러면 전화 바꿔드릴 테니 직접 말씀하세요.”라며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바꾸려는 것을 나는 서둘러 “결자해지(結者解之) 하십시오. 죄송합니다.”라고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다음 날 오전 10시, 대통령은 비서실장 정해창과 경호실장 이현우를 불러 “내가 어제 화가 났었는데 박세환 장군에게 주의 좀 주고 없던 일로 해.”라며 다시 지시를 했다.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이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옷을 벗어야 했다. 지금도 그날의 일을 생각하면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너를 믿는다고 언제나 자신 있게 말하던 그 사람이 제일 먼저 네 믿음을 배신할 것이다.”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오늘의 화두가 아닐까 싶다. 노 대통령도, 박세환도 그리고 나도.

 

군 인사 원칙

1군사령관에 임명되기 전, 나는 육군참모차장으로서 군 인사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진급심사위원장을 맡아 야전군 우대의 원칙을 강조했다. 연대장급 1백여 명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면서 전투력 증강 실적과 지휘력 평가를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육군 전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순수 야전 군인들을 대거 인사에서 우대했던 것이다. ‘전투 잘하는 군인이 최고’라는 인사 원칙을 세운 것이다. 인사에 대해 매번 혹평하던 언론들이 군 인사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나 또한 야전군 우대를 원칙으로 하기에 앞서 재경 지역 서울 근무를 회피하는 등 야전 경험을 쌓기 위하여 야전지휘관을 선택했다. 일신의 영달보다는 남들이 지원하지 않고 꺼리는 곳을 찾아 갔다.

1981년 대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 이종한이 경영학과 출신임을 감안하여 ROTC 학군단장이 경리병과로 분리한 것을 나는 단장에게 전화, 보병병과로 바꿨다. 본인은 아무 말 없었고 내 가족은 섭섭해 하였다. 1983년 3월 소위로 임관 초등군사반과 유격훈련과정도 수료하였으며 전방 6사단 19연대 전투지원중대 소대장으로 경험을 쌓았고 2년 복무 연장하여 서강대학교 학군단 교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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