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서울의 봄

1980년 봄, 소위 ‘서울의 봄’이라 일컫던 분위기는 점점 냉정을 잃어갔다. 1980년의 봄은 5·17 계엄령 확대로 이어졌다. 당시의 국내 상황을 안일하게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관계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만 부르짖었지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정치인들은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혼란을 가중시킬 뿐 수습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이때 북한은 비상을 걸어 놓았다. 많은 장군들은 북한이 간첩을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북한이 전방은 전방대로 준비하고 20만 명의 특수전부대원을 차례로 후방에 침투시킨다면 엄청나게 혼란에 빠질 상황이었다. 우리 수도권의 비대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안보상 가장 큰 취약점이 아닐 수 없다. 수도권에 포탄 몇 발만 떨어져도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돼 있다. 병력의 대부분이 전방에 집중, 수도권에는 없기 때문이다.

전쟁 준비가 가장 잘 돼 있는 상태는 군이 주둔지역에 있을 때다. 훈련장에 나가 있으면 준비태세가 오히려 취약하다. 또 대간첩작전으로 부대원들이 출동해 있어도 문제가 있다.

 

5·18

5·18은 유언비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들 씨를 말리러 왔다” “무지막지한 군인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잘라 냈다” “처녀의 젖가슴을 도려냈다” 등 수많은 유언비어가 사실인 듯 발 없는 말이 천리를 떠돌아다녔다. 주한미군 철수와 반미투쟁 선동 등 북한의 무력적화 통일전술 전략의 주장과 너무도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전국의 세력들이 광주로 몰려들었으며, 교도소와 무기고가 습격되고 군 장비가 탈취돼 그곳에 있던 아시아 자동차가 만든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나주, 화순, 담양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군을 투입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사후 수습이 잘못 되었다. 정확한 원인과 사인(死因) 규명을 기초로 한 처벌과 보상이 있어야 했는데 분위기에 휩쓸려 엉뚱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렇게 시작된 5·18은 전두환 장군이 상임위원장이 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발족으로 끝을 맺었다.

 

직언직설(直言直說)

1980년 5월 17일, 자정이 되면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되고 국회 기능이 정지되었다.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을 가결했다. 시기적으로 매우 민감한 때라 대내외적으로 보안에 부쳤다가, 5월 31일에 이르러 정부 대변인 이광표 문공부 장관이 국보위 설치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 즈음, 전 위원장이 그의 사무실로 불러 내 의중을 물었다.

“사람들은 나더러 대통령을 하라고 하는데, 이진삼 생각은 어때?”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민감한 시기에 집권을 하게 되면 국민들은 마치 5·18이 집권하기 위한 수순을 밟은 듯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차라리 모든 것 내려놓으시고 김포비행장으로 향하십시오. 외국에 나가 계시지요. 5년 후, 다시 돌아오시면 그때는 김포비행장에 인파가 새까맣게 몰려들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을 간단히 말씀드리면 1960년 3·15는 이기붕을 부통령 시키려고 부정선거를 하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 대통령이 하야, 하와이로 망명하고 이기붕 일가가 자살했죠. 그 후 1년간 여·야 정쟁으로 국가혼란을 자초해 1961년에 5·16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나는 그랬다. 그때 당장에 대통령을 하는 것보단 5년 후를 생각하라는 간접표현을 했다. 그러나 내 의중을 듣고 있던 전 장군의 표정에선 이미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는 듯했다. 1주일 후, 전 위원장은 허화평 비서실장을 통해 나를 호출했다. 그 자리에서 전(全) 위원장은 또다시 내게 물었다.

“이진삼, 어떻게 하지? 여러 사람들이 자꾸 내게 집권하라고 해. 국가의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집권해야 된다고. 특히 선배들 말이 많은데 어떻게 생각해?”

“만약 하신다면 깨끗하고 멋있게 하셔야죠. 단군 이래 천추에 빛나는 대통령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전두환 장군은 후에도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상의를 해왔고, 그때마다 나는 소신껏 직언을 했다. 전두환 장군은 군인 그대로 솔직하고 통 큰 남자다운 기질의 소유자다. 시쳇말로 기분파이면서 부하들에 대한 포용력이 크다.

 

정치권의 유혹

5·17 이후 민정당을 창당하면서 충남 부여 출신인 나를 민정당 충남도당위원장 겸 국회의원에 출마할 후보로 추천했다. 그러나 나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전두환 장군을 찾아갔다.

“몸을 가누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아닌 이상 목숨 바쳐 충성하는 군인으로 남겠습니다.”

“맞아, 동기생 중 1차로 장군이 되었는데 군대에 그대로 있어. 군인이 최고 좋지. 나더러 사단장 하라면 다시 하겠어. 경호실장 하라는 것도 이 장군이 원치 않는다고 해서 1년 후배 장세동으로 결정했어. 군에 그대로 있어.”

이후로도 정치권에서의 유혹은 이어졌다. 1985년 2월 12일 총선 때에도 이어졌다. 나는 이 또한 완강히 거절했다.

 

제5공화국의 출범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 서거 이후 유신헌법을 대체할 헌법 개정작업이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다. 1972년 이후 유신헌법으로 치러진 두 차례의 대통령 선거 모두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였다. 그러다보니 1980년 초, 서울의 봄 분위기에서는 대통령 직선제가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5·17 이후로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신군부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문제는 임기였다. 대통령의 임기를 두고 신군부 실세들 간에는 미묘한 신경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모두 6년으로 규정했던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6년이란 숫자에 익숙해 있었다. 다만 장기 집권의 폐단을 막는 단임제 장치를 두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국보위 상임위원인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도 동의했다. 하지만 전두환 위원장은 생각이 달랐다. 프랑스의 예를 들며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은 되어야 한다고 했다. 6년보다는 7년이 낫다는 심중을 드러냈다. 이로써 제5공화국 대통령의 임기는 사실상 7년으로 확정되었다. 이런 가운데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머지않아 사라질 운명에 처한 유신헌법에 의해 8월 27일에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0년 9월 1일에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최규하 대통령의 잔여 임기 7개월간 대통령을 하였다. 이듬해인 1981년 2월 25일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5,271명의 대통령 선거인들이 전국 77곳의 투표장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전두환, 유치송, 김종철, 김의택 등 네 명의 후보가 출마했고, 전두환 대통령은 전체 투표수의 90.2퍼센트인 4,775표를 얻어 7년 임기의 1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유신헌법에 비해 진일보한 것이었다.

 

후계자가 된 노태우

1985년 2월 12일에 있었던 12대 총선은 사실상 집권 여당인 민정당의 참패나 진배없었다. 1980년 봄 이후 5년 넘게 눌려 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때를 같이해 대통령이 되고자 생애를 건 투쟁을 해온 김대중과 김영삼은 선거 투쟁의 사령탑이었다. 때마침 민정당 대표에 있었던 노태우가 후계자로 지목되면서 대통령 후보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리를 맡아 경험을 쌓아갔다. 내 생각으로 노태우 대표가 후계자가 되었던 것은 우리나라의 남북 대치 상황에서 안보를 아는 후임자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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