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목숨건 침투 - 15 제4땅굴 발견 Ⅱ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목숨건 침투 - 15 제4땅굴 발견 Ⅱ
  • 뉴스티앤티
  • 승인 2019.12.30 13: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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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

“사령관님, 땅굴 각도가 잘못됐습니다.”

현장 작업에 참여했던 업체에서 적외선 빔을 잘못 건드려 각도가 위를 향한 바람에 아래로 뚫어야 하는 땅굴이 위로 올라갔다고 했다. 다시 밑으로 꺾기 위해서는 다른 장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조치할 수 있나, 박 장군!”

나는 박 장군의 눈빛을 보며 물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

할 수 있다는데 다른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

“염려 마라. 불가능은 없다. 최선의 방책을 강구하자.”

나는 무엇이든 일단 맡기면 그것으로 끝이다.

의인불용 용인불의(疑人不用 用人不疑), 의심나면 쓰지 말고 일단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작전지휘에 있어서도 군사령관인 내가 지나친 간섭을 하면 오히려 효율적인 지휘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해 꼭 필요한 작전지침만 내렸다. 나는 바로 내 전용 헬기를 띄워 박 준장을 육군사관학교로 보내 필요한 지원을 받도록 했다. TBM(Tunnel Boring Machine)을 사용해 관통 지점 10m를 남겨 두고 엔진 4개 중 두 개를 껐다. 엔진 소리에 적이 관통하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을 우려해서다. 관통 지점 2m를 남겨두고는 엔진 하나만 작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대기시켰다.

 

소탕작전 실시

땅굴(역갱도)은 오후 1시에 관통하기로 했다. 매일 아침저녁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나는 오전 10시부터 현장에서 기도하며 시편 23편 4절을 되뇌었다. 작전에 참가할 부하들의 무사를 기원했다. 수없는 작전을 하면서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그 순간과 다를 바 없었다. 기다리는 3시간이 길고도 길었다. 차라리 내가 작전에 뛰어 들고 싶었다. 현장에는 이미 중국과 북괴를 뺀 국내외 외신기자 40명과 중립국 감시단 8명도 와 있었다. 만약 작전지역에서 폭발 사고라도 일어나면 우리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기자들 역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오후 1시, 마침내 땅굴이 관통되었다. 그곳에 기자들을 앞세워 들여보냈다. 당시에도 종북 세력들은 땅굴을 우리가 팠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 현장을 확인하고 나온 기자들의 눈물, 콧물에 먼지까지 뒤집어 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오후 2시 40분, 여전히 땅굴 발견에 대한 우리의 공식보도가 나가기 전, 땅굴 입구 지역에 위치한 적의 GP에서, 이례적으로 대면을 요구해왔다. 그러고는 우리 쪽으로 다가와 “친구, 그기 땅굴 없으니 찾지 말라우!” 하는 이색 공세와 최초 땅굴 소탕작전 중에 적이 황급히 퇴거하는 일부 징후를 포착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계획보다 앞당겨 작전을 실시한 것은 우리의 희생을 막은 결정적 선택이었다. 오후 7시쯤, 소탕작전을 지휘하던 1팀의 중대장이 목함지뢰 몇 개가 흙탕물 속에 있다는 보고를 했다. 나는 즉시 작업을 중지시켰다. 미리 준비해둔 모래주머니로 지그재그 5중 방호벽을 쌓도록 하고 이어지는 작전은 다음 날로 이어가도록 했다. 또 1팀의 중대장은 버터를 묻힌 정구공을 목함지뢰가 있는 곳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훈련된 군견을 앞세워 들여보냈다. 군견이 정구공을 줍기 위하여 전진하자 잠시 후 “펑” 하는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파편이 나뒹굴었다. 목함지뢰가 있다는 것에 긴가민가하던 모두는 놀랬다. 밖에서 전화로 군견과 함께 들어갔던 중대장을 불렀다.

“코뿔소 하나. 어떻게 됐나, 응답하라, 모두 살았나?”

3분 후 응답이 왔다.

“전부 살았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수고했다 긴장 늦추지 말고, 지금부터 화기는 꼭 휴대하라. 특히 실탄을 확인하라.”

총을 그 안에 두고 나오면 지뢰폭발로 진공이 생겨 자칫 폭발로 이어져 모두 죽을 수 있어서다. 1975년 철원 6사단에서 발견했던 2땅굴에서의 일이었다. 화기로 인한 폭발로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다. 팀원들의 안전을 위하여 준비된 컴프레서를 이용해 공기를 갱내로 공급하였다. 교대한 팀원들은 중대장 이하 모두가 피투성이였다. 파편에 맞은 게 아니라 그 안에서 폭탄이 터져 모래가 날아들어 피투성이가 된 거였다. 거기에 콧물과 눈물이 뒤범벅이었다. 숫자를 세어보았다. 한 명, 두 명,…… 열한 명, 투입된 인원 그대로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먼저 들여보낸 군견은 죽었다. 우리 모두는 달려가 병사들의 피를 닦아주며 눈물을 흘렸다. 병사들도 울고, 우리도 울었다. 그러자 박 준장이 병사들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열중쉬어, 차렷. 기자들과 군사령관님 앞에서 눈물을 보여? 지금부터 10분 후에 다시 작전에 들어간다. 만약 그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들어간다.”라며 병사들을 다그쳤다. 나는 박 준장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미 땅굴 안에서 한 차례 폭발한 터라 적이 역공을 하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한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신속히 작전을 마치는 일만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나는 병사들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하였다. 다른 팀과 임무를 교대시켰다. 교대 병사들은 준비된 막사로 이동, 목욕과 식사를 하고 복장과 장비를 재정비한 후 다시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지휘관이 직접 작전에 뛰어들자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했고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나는 군사분계선 넘어 500m 적 지역으로 진출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적은 이미 퇴각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군사분계선까지 500m 후퇴를 명한 후, 3중 콘크리트 벽을 쌓고 경계에 돌입하였다. 그날로 우리는 군사분계선을 확보했다. 모든 작전을 종료하고 희생된 군견의 사체 수습을 끝으로 군사분계선 점령을 완료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전화를 걸어와 “이 장군, 수고했어. 군견 한 마리만 희생됐다는 보고 받았는데, 충견이구먼. 이진삼, 잘했다. 역시 불가능은 없어. 결국 해냈어. 서울 나오거든 들러라. 무리하지 말고 몸조심 하고.”라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감사합니다, 계속 근무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희생된 군견은 화장하여 제4땅굴 입구 묘 옆에 동상을 세웠다. 이 모든 것은 훈련과 철저한 준비 그리고 정확한 상황 판단, 장병들의 결사 희생정신의 결과였다. 소탕작전을 마친 박영익(예·중장) 장군은 현장을 방문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땅굴 소탕작전도 중요하지만, 발견이 더 중요했습니다. 발견은 백퍼센트 이진삼 사령관님의 노력이었어요. 그 집념이 대단했어요. 땅굴이 있다는 확신과 끈질긴 집념이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우리 같은 사람은 발견 못합니다. 뚫어보면 자연 동굴이 대부분이었거든요. 더구나 펀치볼 같은 험준한 곳, GOP 고지대 145m의 깊이에 땅굴이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조차 하겠습니까. 이 사령관님이니까 가능한 거죠. 찾아낸 것이 80퍼센트, 소탕작전이 10퍼센트, 국민과 전 세계에 리얼하게 적의 실상을 알리는 것이 10퍼센트의 공이라면 이 사령관님은 95퍼센트 이상의 공을 세우신 겁니다.”

 

충견 헌트

충견 헌트는 셰퍼드 종으로 육군 제21사단에서 활약한 군견이다. 제4땅굴 소탕작전을 하며 탐사견으로 땅굴 소탕작전에 투입되어 북한군이 수중에 매설한 목함지뢰를 밟아 폭발시켜 11명의 생명을 구한 충견으로 4살의 나이에 산화하였다. 말 못 하는 짐승이기는 하나, 사람의 생명을 구한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군견으로서는 최초로 ‘소위’라는 장교 계급으로 추서되었고 인헌무공 훈장을 받았다.

 

교훈과 의의

제4땅굴은 1978년 제3땅굴이 발견된 지 12년 만인 1990년 3월 3일에 양구 동북방 26km 지점 비무장지대 내에서 발견되었다. 규모는 높이와 폭이 각각 1.7m, 깊이는 지하 145m, 총길이 2,052m의 암석층 굴진 구조물로 군사분계선의 1,028m 남쪽이었다.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내부 관람용 전동차를 운행하고 있다. 이는 21사단장, 3군단장, 1군사령관을 하며 7년간 끈질긴 집념으로 동부전선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최초로 발견한 땅굴은 북한의 도발 실상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는 점에 그 뜻이 있다. 시추, 발견, 관통 그리고 역갱도 공사까지 국군이 단독 작전으로 실시한 최초의 남침용 땅굴이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희생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한 장병들에게 무공훈장을 달아주고 훈시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던 군사령관 모습을 지켜본 예하 지휘관 참모 등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친애하는 용감한 장병들, 내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땅굴을 발견한 장한 내 부하들, 한 명의 인명 피해도 없이 임무를 수행한 귀한 장병들의 부모에게 나는 할 말이 있다. 명예는 상관에게, 공은 부하에게, 책임은 나에게’라며 부하들에게 공을 돌리는 군사령관 모습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1993년 자연인으로 돌아간 노태우 전 대통령을 만난 사석에서 과거의 땅굴 발견 이야기가 오갔다.

“요사이 들었는데 이 장군과 박 장군이 훈장을 받지 못했다고? 인민군 수천 명을 잡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땅굴 발견이야. 이 장군 아니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거야. 개 한 마리 죽고 인명 피해도 없었잖아. 송응섭(예·대장) 장군에게서 들었다. 사양한다고 세운 공을 훈장 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나?”

“박 장군이 훈장을 못 받은 점은 안타깝습니다. 당시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훈장의 반을 수령했다고 합니다.”

“내가 대통령 마치고 나니 미처 몰랐던 것들과 아쉬운 것들이 많아. 내가 대통령하면서 군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이진삼 장군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기회 있으면 제4땅굴을 방문하고 싶다.”며 격려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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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자 2020-01-18 18:09:46
신뢰와 믿음이 조직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