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엘리트 체육과 생활 체육의 활성화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되어 제일 먼저 내건 목표는 전국 각지의 생활체육 활성화와 청소년 육성 시설의 확대가 절심함을 느꼈다. 게이트볼 등 체육시설 10개가 노인병원 20개의 효과가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현재는 생활체육협의회를 대한체육회가 합병하여 관리하고 있다. 당시는 국위를 선양하는 올림픽을 위한 대한체육회를 필두로 한 엘리트 체육과 국민생활체육협의회를 활성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각 지방 단위로 청소년 훈련 시설과 일반 국민의 생활체육 활성화에 대한 수요를 정책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야구와 골프 선수의 국위선양도 큰 몫을 하였다. 건강과 여가선용의 생활체육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육체적 정신적 투자대비 효과가 대단했고, 지방자치단체별로 행사를 통해 세계적인 청소년 잼버리 대회도 개최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2년도 동계와 하계 올림픽에서의 국위 선양과 국민생활체육, 그리고 청소년 육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동계올림픽 최초의 메달

우리나라는 동계올림픽 1회에서 15회까지 한 번도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1992년 2월, 드디어 제16회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건국 이후 최초로 금 2, 은 1, 동 1개 총 4개의 메달을 획득하여 64개국 중 10위, 아시아권에서는 1위를 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제16회 동계올림픽을 앞둔 1992년 초, 서울 목동아이스링크에서는 국제실내스케이트대회가 열렸다. 개회사를 하기 위해 참석했던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부인들로 목동아이스링크 안이 빼곡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물었더니 선수 선발을 위한 학부모들의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말하자면 코치나 감독을 향한 학부모들의 치맛바람이었다. 3일 후 체육진흥국장에게 지시하여 동계올림픽 회장과 코치와 감독들을 체육청소년부 회의실로 집합시켰다.

“목동 인근 호텔 일식당과 청량리 삼화일식, 장충체육관 앞 일식당 등에서 선수들의 부모로부터 접대를 받고 선수 선발을 하는 코치와 감독은 징계하겠다”는 포고를 했다. 그리고 관계 부서로 하여금 감시 감독을 철저히 하겠다고 강조하였다.

동계올림픽 국가대표 선수 선발은 학부모와 코치, 감독의 연결고리로 결정되고 있었다. 공정한 선수 선발이 승리의 지배적 요소다. 체육계 전반적인 부정비리를 뿌리 뽑겠다고 선언하였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대표 선수를 선발할 때 학연, 지연에 관계없이 선수를 선발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정한 선수 선발만이 동계올림픽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믿었다.

1992년 7월, 제25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하계올림픽에서는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을 하며 금 12, 은 5, 동 12개 총 29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169개 참가국 중 세계 7위의 성과를 올렸다. 무엇보다 일본을 제압함으로써 아시아권의 체육판도를 바꿔 놓았다. 마지막 폐회식장에서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의 금메달 획득으로 세계인의 기립 박수를 받는 가운데 메인스타디움에서 세계의 TV화면에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했다. 올림픽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88올림픽에 이어 드높였다.

황영조 선수는 올림픽 2개월 전부터,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더위와 싸워가며 전지훈련을 한 덕분에 영광의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코오롱 이동찬 회장, 육상연맹 박정기 회장, 이진삼 장관 3박자의 작품이다.

무엇을 하든 맡은 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늘 핵심이 무엇이고,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서 하는 끈질긴 노력이 성공의 비결이다. 말보다는 실천, 계획보다는 결과다.

 

똑똑히 모셔

노 대통령은 신중한 분이다. 어떤 일이든 생각에 생각을 더한다. 1992년 6월의 어느 일요일, 노 대통령 내외분 등 세 선배 가족들과 함께 남녀 두 팀으로 태릉에서 골프를 치고 식사를 하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철도 노조원에 대한 보고를 드렸다.

“아무리 민주주의라지만 노조원들이 전철역장을 무릎을 꿇려놓고 발길질해대는 모습이 TV전파를 타서야 되겠습니까. 국민들의 눈에 비친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 강력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노 대통령이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용광로는 부글부글 끓어야 작품이 나오는 거 아니겠어? 민주화도 마찬가지다. 그런 과정을 겪어야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대통령의 대답이 나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그것을 보고 자라나는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

그때였다. 말을 계속 이어가려는 순간, 함께 있던 선배 한 분이 “식사하시지요.” 하면서 내 말을 가로막았다. 옆의 아내도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바른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도처에서 민주화 바람으로 국가 기강이 흐트러진 때였다. 군 통수권자 대통령에게 ‘물태우’라고 하는 일부 국민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개인적 견해를 이야기한 것은 잘못이지만, 대통령의 ‘용광로는 부글부글 끓어야 한다.’는 말을 혹시라도 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더 큰 문제일 것 같았다. 그러니 나로선 점수 잃을 것을 각오하고 진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이 장관, 대통령께 국가의 기강과 치안에 대한 진언 좀 하시오.”라는 당부를 해왔다. 그들 모두는 노 대통령 당선을 위해 강력히 지지했던 유권자 국민들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던 마지막 세 번째 차에 오르려는 순간, 문을 열어주기 위해 다가선 이현우 경호실장에게 나는 기어이 한마디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

“윗분, 똑똑히 잘 모셔!”

차에 오르자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여보, 왜 그런 말까지 하셨어요. 좀 그랬어요, 듣기가.”

무슨 일인가 싶은 운전기사의 표정이 백미러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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