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뉴스티앤티

YS는 안 됩니다

6공화국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노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은 후계자였다. 이전인 1990년 1월 22일, 여소야대의 정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 JP(김종필 총재), YS(김영삼 총재), TJ(박태준 최고위원)가 3당 통합을 한 후부터 이어진 고민이었다. JP는 젖혀 두고 YS냐, TJ냐를 따졌다. 한번은 내게 의중을 물어오기에 “YS는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루는 YS의 측근인 최형우 정무장관이 나를 찾아와 “이 형, 도와주세요. 대통령께 말씀 좀 잘해 주세요. 우리 집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사정을 했다. 나는 “정치에 관여 않기로 했다”며 대화를 잘랐다.

그 이전 3당 합당할 당시에도 나와 박철언은 YS와의 합당을 반대했었다. 영호남 화합을 이루기 위해선 YS 대신 DJ와 합당하기를 바랐다. 어떤 상황에서도 직언직설을 마다하지 않았던 나로선, YS에게 딱히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결국 YS와 합당을 했고, 합당 이후 YS는 배신에 배신을 거듭했다. 무엇이 우리 국민을 위해 최선인가를 생각하고 소신껏 드렸던 충언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소신 있는 내 충언은 이후 YS가 14대 대통령이 된 후 예측했던 일로 나타났다. 1993년 2월 25일 집권한 김영삼 정권은 감사원, 국세청, 안기부, 군, 검찰, 경찰, 경제인, 정치인 등에서 숙청 대상을 정하고 5~6공 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 인사, 율곡비리 등 2개월간 친인척까지 샅샅이 뒤졌다. 내게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자 서울지검 공안검사를 동원, 나와 무관한 정보사령부 사건을 부풀려 언론공작을 폈다. 사건도 아닌 사건을 나와 관련지어 1개월간 언론 플레이를 하고 피의자를 연행, 그들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나와 관련 있는 것처럼 피의자로 만들어 입건시키려 애쓴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나의 알리바이가 확실해지자 이번에는 얼토당토않은 일을 굴비처럼 엮어 넣기 시작했다. ‘정의롭게 살자’를 삶의 신조로 했던 나에게 화살을 조준했다.

지금껏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국가에서 잘했다고 훈장을 주진 못할망정, 하지도 않은 일로 한평생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키며 살아온 내게 이래도 되는 것인가.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받게 돼 있다, 반드시. 아직 돌려받지 않았다면 받지 않는 게 아니라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사필귀정, 이제 때가 왔다. 이 문제에 대해선 18장에서 자세히 밝히기로 하겠다.

 

손 내민 YS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YS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은밀하게 ‘YS 대통령 만들기’가 시작됐다. YS로부터 내게 만나자는 연락이 온 것은 1992년 11월이었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있고, 대통령 후보로 자신을 반대했던 나를 회유하여 선거운동을 부탁하려는 의도였다. 저녁 8시, 하얏트 호텔 방에서 만나 30여 분 대화를 나눴다.

“선거 좀 도와주시오, 이 장관.”

YS는 내게 봉투를 내밀며 부탁했다. 나는 받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다시 봉투를 내 손에 쥐어주기에 방 안으로 던져놓고 나왔다. 장관직을 끝으로 미국 UCLA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이 예정되어 있어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JP(김종필)와의 첫 만남

많은 사람들이 내게 갖는 선입견 중 하나가 김종필 씨와 나의 친분에 관한 것이다. 둘의 고향이 같은 부여라는 것만으로 일부는 내가 그와 막역한 관계인 줄 알고 있다. 그의 형 김종익 의원과는 친분이 있다. 고향 부여 학교 스승님이셨다. 노 대통령이 JP에게 “같은 고향 이진삼 장군 만나보세요.”라는 말에 JP는 내가 잘 아는 유성열이란 부여 고향 사람을 통해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와 용산우체국 앞 한정식 집에서 만난 것이 첫 만남이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군과 정치인은 기질과 성격이 다르다. 군인 출신답지 않고 구태정치 냄새나는 김종필 씨의 인생철학, 가치관, 생활관이 나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1999년 국무총리 김종필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부여 지역구 국회의원 출마를 권하기 위해서였다. “부여 군민들은 이진삼 장관이 국회의원 하기를 원하고 있소. 내 다음으로 정치해보시오.”라는 것이었다. 나의 기억으로 8년 전인 지난 1991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은 부여 고향에서 국회의원 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한 적이 있었으나 사양하자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시킨 것이다. 당시 김윤환 사무총장에게 JP를 전국구로 보내고 이진삼으로 연구해보라는 지시가 있었다. JP는 당시 지역구 욕심을 못 버리고 김윤환에게 한 번 더 하겠다며 노 대통령에게 건의해 달라고 부탁한 것을 내가 청와대 방문 시 이병기 실장이 현관에서 나를 안내하며 귀띔해 주었다. 8년이 지난 시점에 자의에 의하여 나에게 지역구를 권한 것이다. 나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국회에 입성,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김대중 정부의 국방정책에 불만이 있을 때였다. 나는 약속하고 미국 Cal Poly 대학교 산업교육연구소 이사장직을 인계하기 위하여 3주간 LA를 다녀왔다. 자민련은 50석이 4년 만에 17석으로 전락된 시점으로 김용환 의원의 권고로 같은 김해 김씨인 김학원 한나라당 의원을 자민련으로 입당시켰다. 김 의원은 “이진삼 선배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자 JP는 이 장군과 이야기 되었으니 염려 말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역시 정치 9단으로 9선 국회의원다운 대답이었다. 국무총리까지 한, 필요에 따라 처신하는 군과 고향 선배에 대하여 나는 머리를 흔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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