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제공)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第1, 2, 3 땅굴에서 確認(확인)한 바와 같이 北傀(북괴)는 全(전) 前線(전선)에 걸쳐 71年末(년말)부터 땅굴을 掘設(굴설)하기 시작하여 76年末(년말)까지 集中的(집중적)으로 工事(공사)를 實施(실시)해온 것으로 判斷(판단)됨으로 앞으로 探査活動(탐사활동)은 軍事分界線(군사분계선) 남쪽 1km 以內(이내) 地域(지역)에 集中(집중)할 必要性(필요성)이 要求(요구) 되었으며, 豫想(예상) 軸線(축선)도 正確(정확)한 入口(입구) 地点(지점)을 再確認(재확인)하고, 이 地域(지역)에 이르는 基点(기점)이 될 만한 地形(지형)을 分析(분석)하는 등 旣存(기존) 豫想(예상) 軸線(축선)의 再檢討(재검토)가 要望(요망) 되었음.

作戰(작전) 實施間(실시간) 軍司令官(군사령관)의 作戰指導(작전지도) 指針(지침)에 依據(의거) 迅速(신속) 果敢(과감)한 作戰(작전) 展開(전개)와 狀況(상황) 發生(발생)에 따른 適時適切(적시적절)한 措置(조치)를 취함으로써 한명의 人命(인명) 被害(피해)도 없이 作戰(작전)을 成功的(성공적)으로 遂行(수행)할 수 있었음. 最初(최초) 地雷地帶(지뢰지대) 逢着(봉착) 當時(당시)에는 坑內(갱내)에 7cm 깊이로 고여 있는 맑은 물속에 敵(적) 地雷(지뢰)가 埋設(매설)된 것을 肉眼(육안)으로 確認(확인)할 수 있었으나, 不過(불과) 3-4초만 作戰(작전)이 遲延(지연) 되었더라도 흙탕물이 흘러내려 地雷(지뢰)를 發見(발견)치 못하였을 것임. 또한 水中(수중) 플라스틱 地雷(지뢰) 1發(발) 爆發時(폭발시) 忠犬(충견)은 희생 되었으나 空氣(공기) 流壓(유압)에 의한 人命(인명) 被害(피해)가 없었던 것도 通路(통로)를 開拓(개척) 臨時(임시) 防護(방호) 防壁(방벽) 構築(구축)을 竝行(병행)하면서 作戰(작전)을 實施(실시)했기 때문에 爆風(폭풍)에 의한 衝擊效果(충격효과)를 막을 수 있었으며, 十姉妹(십자매)를 利用(이용)하여 爆發後坑內(폭발후갱내) 가스 窒息效果(질식효과)를 試驗(시험) 함으로써 作戰(작전) 兵力(병력)의 安全(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음.

79年부터 陸軍(육군)에서는 新型(신형) 試錐機(T – 4W) 6台(대)를 導入(도입) 本格的(본격적)인 探査活動(탐사활동)을 實施(실시)하였으며, 지금까지 總(총) 3,502孔(공) (군정면 : 1,132孔공)을 굴착하였으나, 케이싱 作業(작업) (Casing : 6 쇠파이프관을 표토층에 박는 작업) 시 監督(감독) 疎忽(소홀)과 試錐孔(시추공) 管理不實(관리부실)로 975孔(공) (군정면 : 384공, 34%)이 무너지거나 막혀서 使用(사용)할 수 없는 事實(사실)을 勘案(감안)할 때 關係要員(관계요원)은 1개공 굴착 시 所要全額(소요전액) 300萬(만)원이 投資(투자)된다는 事實(사실)을 認識(인식)하고 效果的(효과적)인 豫算活用(예산활용)과 探査活動(탐사활동)이 持續(지속)될 수 있도록 試錐孔(시추공) 케이싱 作業(작업) 시 암반층 깊숙이 (6-8m) 投入(투입), 암반층과 케이싱 사이에 틈이 생겨 모래나 흙이 흘러 들어가 막히는 일이 없도록 細密(세밀)한 指導(지도)와 監督(감독)이 要求(요구)되었으며, 試錐孔(시추공) 水位測定(수위측정)도 實施(실시)하여 異常變化(이상변화) 捕捉時(포착시) 卽刻的(즉각적)인 措置(조치)를 取(취)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고, 今番(금번) 逆坑道(역갱도) 工事時(공사시) TBM 裝備(장비)가 旣存(기존) 試錐孔(시추공)을 通過(통과)하면서 發生(발생)한 現象(현상)(가스분출, 시추공 수위 급속낙하)을 傳播(전파)하여 敵(적)이 旣存(기존) 試錐孔(시추공) 地点(지점)을 通過(통과)해서 땅굴을 掘設時(굴설시) 上記(상기)와 같은 徵候(징후)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持續的(지속적)인 敎育(교육)과 監督(감독)이 이루어져야 함.

 

結論

제4땅굴 發見(발견)은 71年 最初(최초) 徵候捕捉時(징후포착시)부터 90年 完全(완전) 掃蕩作戰(소탕작전) 完了時(완료시)까지 作戰(작전)에 參與(참여)한 수많은 將兵(장병)의 줄기찬 努力(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다.

忠誠心(충성심)과 服從心(복종심)이 充滿(충만)한 兵士(병사)들은 上官(상관)의 指示(지시)를 充實(충실)히 履行(이행)하였고, 責任感(책임감)으로 充溢(충일)된 幹部(간부)들은 어려운 고비에서마다 率先垂範(솔선수범) 하였으며, 專門(전문) 探知(탐지) 要員(요원)들은 끊임없는 硏究分析(연구분석)과 科學的(과학적) 技法(기법)의 導入(도입)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重要(중요)한 것은 前·現職(전·현직) 指揮官(지휘관)의 끈질긴 執念(집념)과 意志(의지)였다. 部隊(부대)가 日常業務(일상업무)를 遂行(수행)할 때도 수많은 葛藤(갈등)과 摩擦(마찰) 要因(요인)을 接(접)하게 되는 것은 常例(상례)일 것이다. 하물며 宇宙探査(우주탐사) 보다도 어렵다는 땅굴 探知(탐지) 活動(활동)을 20年 가까이 推進(추진)함에 있어서랴!

지친 兵士(병사), 나태해진 幹部(간부)를 채찍질하여 이들에게 活力(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覺悟(각오)로 業務(업무)를 다시 推進(추진)하게 만든 것이 바로 指揮官(지휘관)의 意志(의지)와 執念(집념)이었고, 反復(반복)된 失敗(실패) 속에서 自暴自棄(자포자기) 狀態(상태)에 빠진 將兵(장병)들에게 날카로운 判斷力(판단력)으로 새로운 方向(방향)을 提示(제시)하여 部隊(부대)의 力量(역량)을 目標(목표)를 向(향)해 集中(집중)토록 誘導(유도)한 것도 指揮官(지휘관)의 意志(의지)와 執念(집념)이었다.

제4땅굴 發見(발견)은 北傀(북괴)의 南侵(남침) 威脅(위협)이 있음을 實證(실증)하였고, 全國民(전국민)에게 安保意識(안보의식)을 鼓吹(고취)시켰다는 点(점)에서도 높이 評價(평가) 되어야 하겠지만 部隊(부대)에서 指揮官(지휘관)이 무엇인가를 立證(입증)해 보인 快擧(쾌거)이기도 하였다.

大小(대소) 部隊(부대)의 指揮官(지휘관)을 歷任(역임)했거나 歷任(역임)할 우리 모든 幹部(간부)들은 軍(군) 統帥綱領(통수강령)에 나오는 아래의 驚句(경구)를 다시 한 번 마음속 깊이 되새겨야 하겠다.

指揮官(지휘관)은 部隊(부대)의 核心(핵심)이며 原動力(원동력)이다. 자고로 戰勝(전승)은 指揮官(지휘관)이 勝利(승리)를 確信(확신)하는데서 비롯되고 敗戰(패전)은 敗北(패배)를 自認(자인)하는데서 發生(발생)한다.

部隊(부대)의 意志(의지)는 指揮官(지휘관)의 意志(의지)이고 따라서 戰爭(전쟁)의 勝敗(승패)는 指揮官(지휘관)의 意志(의지)로 支配(지배)된다.

無敵(무적)의 로마군을 恐怖(공포)에 떨게 한 것은 카르타고 軍(군)이 아니라 한니발이며, 고올을 占領(점령)한 것은 로마군이 아니라 시저이다.

3培(배)의 優勢(우세)를 자랑하는 유럽 聯合軍(연합군)에 대항해서 7年間(년간)이나 나라를 防衛(방위)한 것은 프러시아軍(군)이 아니라 프레드릭 大王이었던 것이다.

 

제4땅굴 – 군 장병 교육 자료(군사연구소)

험준한 지형과 악천후를 극복하고 동부전선에서 최초로 발견한 제4땅굴은 야전성 강한 이진삼 장군이 21사단장(1982-1985), 3군단장(1987-1988), 1군사령관(1989-1990)을 역임하면서 8년간 전장병과 더불어 슬기와 지혜를 모은 끈질긴 노력의 결과이다.

24시간 3교대 근무 가능한 탐지요원 및 경계병력 증원, 장교·하사관·병사 중 우수자원을 선발하여 교육, 숙영시설 보강, 특식제공 등 근무여건 조성과 사기진작을 위해 노력하였다.

적갱도 입구(항공사진)를 분석하고 시추기를 전방으로 추진하기도 하였다. 발견 후에는 적의 역대책으로 인한 방지와 보안 유지를 위하여 역갱도 관통일인 1990년 3월 5일을 48시간 앞당겨 3월 3일에 관통할 것을 군사령관이 직접 대통령께 건의, 조기 관통함으로써 군견 한 마리의 희생만 있었을 뿐, 아군의 희생 없이 갱도를 소탕하였다.

1982년 12월 4일, 이진삼 장군은 동기생 중 제일 먼저 소장으로 진급, 사단장을 하였는바, 황영시 참모총장에게 험준한 동부전선의 21사단을 자청 보직하였으며, 중장 진급 시에도 특전사령관에 내정되었던 것을 박희도 참모총장에게 가장 험한(21사단 관할) 3군단장을 희망하였다. 대장 진급 시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3군사령관으로 내정하였으나, 제1야전사령관(3군단 관할)으로 건의, 부임하여 결국 제4땅굴을 발견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희생을 각오하고 임무를 수행한 장병들에게 무공훈장을 달아주고 훈시를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던 이 장군을 지켜본 지휘관 참모 등은 당시의 훈시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내 직책 내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땅굴을 발견한 장한 내 부하들.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임무를 수행한 귀한 자식들의 부모에게 나는 할 말이 있다. 名譽(명예)는 上官(상관)에게, 功(공)은 部下(부하)에게, 責任(책임)은 나에게!”라고 훈시한 살신성인한 당시의 군사령관 모습을 우리는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장군은 上官(상관)과 部下(부하)에게 모든 名譽(명예)와 功(공)을 돌리고 훈장을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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