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난민 수용소

주월 한국군에 월남은 쌀을 지원하도록 각서(覺書)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시사철 월남은 이모작으로 쌀이 풍부하였으며 보리밥 신세인 한국 장병들은 마음껏 먹었다.

주월 한국군 군수사령부로부터 1966년 7월, 10개월간 먹고 남은 쌀을 기증하기 위하여 월남 피난민들을 수용하는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기동대장으로 대원들을 총동원하여 월남 경찰과 합동으로 테러 위협으로부터 방호하기 위하여 행사 시작 2시간 전에 행사장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의 입구에서 비노출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월남의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랜드 장군과 루시 주월 한국군 미 연락단장, 주월 한국군 채명신 사령관과 이범준 사령관 등 3개국 주요 인사들이 단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상에는 월남어로 ‘피난민을 위한 백미 기증식’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밑에는 ‘퀴논 : 피난민 대표’ ‘기증 : 주월 한국군 사령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월남에서 생산된 안남미(安南米) 1,000여 포대를 단상 주위에 방호벽으로 둘러쌓아 놓았다. 당시 월남은 일부다처제였으며 남자들은 군에 입대하여 참석자 대부분은 여자였다. 임신하여 불룩한 배 위에 젖먹이 아이를 앉히고, 큰 아이는 손을 잡고 참석하였다. 식전 행사로 한국군부대의 태권도 시범이 있었고, 참가 귀빈들의 지루한 축사가 이어졌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 한복판에 앉아 있는 피난민들에게 특히 한국군 장군들의 축사는 참모들이 써준 축사를 통역까지 해가면서 다 읽어가는 길고 지루한 행사였다. 귀대하여 나는 군수사령관을 만나 몇 가지 건의를 드렸다.

“사령관님, 오늘 피난민들에게 준 쌀은 월남쌀입니다. 한(韓)·미(美)·월(越) MOU(양해각서) 체결로 받은 쌀이 남았으면 퀴논시를 통하여 피난민을 도와주면 될 것을 3국의 주요 인사들을 모아 놓고 행사까지 하는 욕먹을 일을 왜 합니까? 오늘 행사가 우리 군수지원사령부 주관행사가 아닙니까? 민사군정참모를 의정장교로 잘못 보직시켜 소령 김○○가 크게 일을 벌여 놓은 것이 아닙니까?”

나는 방첩대장인 내게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였다. 속된 표현으로 염치없는 행사였다. 누가 준 쌀인데 주인에게 돌려주며 광내는 꼴이 되었다. 그 후 나는 퀴논항에 정박 중인 보리밥 먹는 한국 해군에게 쌀과 부식을 보급토록 하고 C-rations(C-야전 식량) 등 남은 보급품도 지원하였다. 해군에게 부탁, 수송선(LST) 운항 시 한국으로부터 김치를 가져오도록 요청하여 후송 병원 입원환자들에게 급식하여 건강회복에 도움을 주었다.

 

파월 전의 약속

뉴질랜드 문화사학자 엘뤼네드 서머스 브렘너는 “밤이란 인간에게 망각과 회복의 기회를 준다.”고 했다. 역사가 루이스 멈포드 또한 같은 의미의 말을 했다. 베트남에 가 있는 기간이 한국에서의 해프닝에 대한 망각과 회복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러했다.

나는 약속대로 일 년 만에 베트남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다. 윤 사령관은 내게 일 년 전 맡았던 특공대장 임무수행을 다시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는 완강히 거절했다. 하지만 “현재 김 소령은 부하 지휘를 잘 못한다. 간첩 잡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며 내게 복귀하도록 했다.

“저는 대위입니다. 소령 자리 아닙니까? 소령 중에서 골라 보십시오. 저는 방첩대를 떠나겠습니다. 죽을 고비 넘기고도 억울하게 언론에 당했는데, 또 당합니까? 전투부대로 보내 주십시오.”

귀국 전, 나는 일반부대로 전출 희망서를 제출했으나 다시 방첩부대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업무차 인사과에 들렀더니 베트남에서 귀국한 하사관 셋이 보직 발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하나같이 볼멘소리를 했다.

“이 대위님, 어떻게 이런 인사가 있습니까? 월남에 갈 때는 진급 우선권, 보직 우선권을 약속해놓고 어째서 우리들이 원하지 않는 곳에 발령을 내놓습니까?”

살펴보니 대전에 집이 있는 사람을 춘천으로, 서울 사람을 전방으로 발령을 내놓았던 것이다. 묵과할 수 없었다. 나야 뭐 아무 데나 가란 데로 가면 그만이지만,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특공대장으로 부하들과 일산, 파주, 문산, 앵무봉, 노고산 등 잠복, 접선으로 간첩 잡는 곳에서 맴돌아야 하는 나의 처지를 성토했다.

“말이 방첩대지, 나는 군복 입고 산만 타야 합니까? 그래도 나는 불만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사관들에게는 월남 가기 전 약속했던 보직 우선권과 진급 우선권을 지켜주십시오. 인사과장 소관 아닙니까?”

내 말에 인사과장 중령 황진기가 내 의중이 딴 데 있음을 눈치 채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왜 그래?”

“나는 필요 없습니다. 이 사람들, 원하는 곳에 보내주십시오.”

인사과장에게 당부하고는 “여러분, 우리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고 따랐을 뿐입니다”며 하사관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을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보직을 바꿔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이의제기 없이 군이 원하는 곳으로, 일 년 전의 간첩 잡는 그 곳으로 갔다. 소령 자리였지만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 방첩부대 특공대장 자리였다. 대공처장의 말에 따르면 특공부대원들이 나의 조기 귀국을 희망하며 재보직을 원했다고 한다.

다른 대원들은 도시에서 사복 입고 근무하며 정보, 보안, 행정 근무로 편안하게 지내지만, 나는 기껏해야 한 달에 열흘 남짓 가족을 만날 정도로 험하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고생하는 부하들 곁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은 그들의 애국심에 불타는 눈동자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체격에 안 맞는 전투복과 군화

1966년 3월 미국으로부터 지급받은, 체격에 맞지 않는 전투복과 군화를 보면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3학년생도 지도하에 큰 포대 같은 옷을 뒤집어 각자의 체격에 맞게 대충 가위로 자르고 서투른 솜씨로 꿰매어 입고 훈련받던 기억이 났다.

나는 신장 160cm의 작은 병사에게 미군용 180cm 신장의 두꺼운 면직 전투복과 280mm 군화를 착용시키고 야전잠바, 철모, 탄대(실탄), 소총(기관총), 2개의 수류탄, 방독면, 수통, 항고, 배낭(모포, 우의, 세면도구, 건빵)과 같은 기본 휴대품에 무전기, 지뢰 탐지기 등 자기 체중에 가까운 57kg을 짊어진 사진을 촬영하고 설명서를 포함하여 직접 군수지원사령관에게 보고하였다. 사령관은 보급정비처장을 불러 주월 한국군 중장 채명신 사령관과 주월 총사령관 대장 웨스트모랜드 대장에게 보고토록 지시하였다. 주월 총사령관은 미 본국에 보고하여 피복, 군화, 모포 등을 한국에서 제조, 납품하도록 조치 받았다. 이범준 군수지원사령관은 귀국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박 대통령은 상공부 장관에게 지시하여 전국 직물회장들과 신발 제작자를 청와대로 초대, 국내외 전 장병에게 제조, 보급토록 하였다. 이로써 국군 사기는 물론 국가 경제발전에도 기여한 공로로 이범준 사령관은 애국자로 칭송받고 하사금까지 받아 왔다. 이범준 장군은 윤필용 장군에게 이것이 이진삼의 작품임을 밝히고 월남으로 복귀하여 한국에서 있었던 상황을 상세히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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