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전 체육청소년부장관, 전 국회의원) / 뉴스티앤티

쳐들어간다, 북으로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함께해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심중을 파고들어 신뢰를 쌓아야 했다. 그들을 2칸 조그만 집으로 초대했다. 두 남매와 임신 8개월째로 접어든, 배가 불룩한 나의 아내를 소개했다. 진심은 통했다. 몇 순배의 잔이 돌고, 상 위의 음식을 몇 번이나 다시 채우는 사이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아내가 남매와 함께 빈 주전자를 들고 문을 나설 무렵, 나는 그들에게 핵폭탄을 던졌다.

“우리는 쳐들어간다, 북으로!”

나는 핵폭탄을 던져 놓고 후폭풍을 기다리며 그들을 주시했다. 기다리는 그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느 누구도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왜를 묻지 않았다. 아찔했다. 혹시 기밀이 누설되었나 하는 생각으로 혼란스러웠다. 어렵사리 입을 떼 다들 알고 있었는지를 물어도 대원들은 좀체 말문을 열지 않았다. 한참을 뜸들인 후 하는 소리가 “짐작했다”였다.

아이러니한 삶이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북에서 남으로 향했던 총부리였다. 그 총부리를 이제 남에서 북으로 돌려야 하는 것이다. 막연히 ‘짐작했다’가 바로 현실이 되는 것이기에 그들의 혼란과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다시 내 마음을 갈무리했다. 그들에게 혼란이 아니라 확신을 심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판단이 섰다.

 

담금질

평상시의 땀방울은 전시에 피를 대신한다. - 이진삼 -

우이동 계곡으로 다시 향했다. 사격은 물론 수류탄 투척 훈련을 위해서였다. 그들 모두가 특수부대 출신인 만큼 개인훈련은 더 할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는 단체훈련에 주안점을 뒀다. 예를 들어 적 1개 소대가 공격해 온다고 가정하면, 표적은 30개가 넘는다. 기관총의 경우도 표적 하나하나를 제압해야 한다. 30개의 표적이 대형을 갖춰 공격해오는 게 아니어서 하나하나를 제압하는 길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가까이 다가오는 적 1명에 대해 조준하여 3발을 쏘고, 다음 1명에게도 조준하여 5발을 쏘는 방법으로 제압하면 30명을 제압하는 데 총 180발이면 충분하다. 각자 소지할 수 있는 총알 수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무엇보다 팀 호흡을 위해선 맹렬하고 무자비한 돌격 구호가 필요했다. ‘돌격 앞으로’는 한마디로 공격 기세를 뜻한다. 저돌적으로 돌진해야 한다. 또한 초반에 다량의 사격을 가해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돌격 시 함성 또한 중요하다. 적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때문이다. 나는 대원들에게 “박살내자!”는 돌격구호를 주문했다. 대원들은 일제히 “박살내자!” 함성과 함께 돌진하며 서서쏴 자세를 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돌진 중에도 탄창 교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또한 그저 휘두르는 사격을 주의시켰다. 사격통제다. 적에게 위협이 되긴 하겠지만 살상이 어려운 것은 물론 실탄 낭비일 뿐이다. 전투 시 표적이 모두 한눈에 보이는 건 아니다. 표적이 안 보이면 의심되는 곳을 하나하나 제압해야 하고, 또 정확히 조준 사격해야 한다. 2명이 사격 시에는 팀별 교대로 적에게 접근, 지근거리에서 조준사격으로 완전 섬멸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수류탄 투척 거리 역시 적의 20m 이내로 접근하여 정확하게 투척해야 한다. 앞에총 또는 돌격자세로 이동 중일 때는, 목표가 나타나면 왼손으로 안전핀을 뽑아 오른손으로 수류탄을 던진 후에는 즉시 사격자세로 들어가야 된다.

6·25 전쟁 당시 아군은 수류탄전에서 완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병들은 훈련과정에서 투척방법만 잠시 교육받았을 뿐 실제로 수류탄을 던져본 적이 없던 터라 안전핀을 뽑고 좌우를 살피다가 부근에 떨어뜨려 오히려 아군의 사상자를 낸 경우가 허다했다. 심지어 안전핀조차 뽑지 않은 채 던진 병사도 있었다. 반면 중공군은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과 전투를 하면서 부족한 화력을 수류탄으로 대신한 터라 한 손에 방망이 수류탄 세 발을 쥔 채 안전 고리를 손가락으로 끼어 다발로 던지곤 했다.

3주 동안 매일같이 8시간의 훈련을 끝내고 나면 나는 물론 대원들의 몰골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흙투성이가 되곤 했다. 나는 그들을 데리고 계곡 상류로 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두가 앞다퉈 발가벗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은 어린아이들과 같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뒤돌아서 쏘고 달아나면 어떡하려고……” 하던 윤 장군의 말이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진심과 실력으로 쌓은 신뢰

그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한 지 4주 남짓, 그것도 그냥 자연스레 알게 되어 훈련을 시작한 것이 아닌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고 쏴대던 사이가 아니었나. 설상가상으로 남은 시간도 촉박했으나 화살은 시위를 떠났고 강은 건너야 하니 배의 견고함과 사공의 진정성을 믿을 수밖에.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생각하며 자식으로서의 마지막 인사를 드릴 겸 나는 그들을 데리고 얼마 전에 작고하신 선친의 묘소가 있는 고향을 찾았다. 마을에 접어들자 많은 사람들이 알은체하며 반가워했다. 시골 작은 마을에서 육군 장교가 나왔다고 너도나도 자랑스러워했던 고향 마을이다. 뜻밖이란 듯 대원들의 표정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일일이 손을 흔들어 답을 해주며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선친의 묘에 절을 올릴 땐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저마다 제 고향의 부모님을 떠올리는 듯 숙연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갑산옥 여주인의 환대와 낙화암의 풍광과 고란사의 그윽한 풍경 소리, 그리고 백마강을 뒤로 하고 상경한 대원들이 이제는 친형제처럼 느껴졌다.

이튿날, 나는 바로 대원들에게 야전삽 한 자루씩을 나눠줬다. 총과 삽은 신랑 각시나 진배없다. 삽은 항상 총과 함께 휴대해야 한다. “총알이 사람을 피하는 것이지, 사람이 총알을 피하는 건 아니다”라는 운명적인 말을 믿어선 안 된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들은 월맹군의 박격포탄과 전방 100m 앞에서 퍼부어대는 기관총 사격에 철모와 손으로 호(壕)를 파 위기를 모면했다. 나는 “호를 파지 않고 방어선을 치는 건 이미 적에게 항복하는 것”이라 했다. 호를 파는 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다. 몸을 숨길 만한 지형지물이 없으면 엎드린 자세에서 머리 쪽의 흙을 파내고, 파낸 흙을 적의 방향에 쌓는다. 맨 처음 엎드릴 만한 길이와 폭으로 흙을 파서 적 방향에 쌓아 사격자세를 취할 수 있으면 급조 호는 완성이다.

적정(敵情)과 지형지물에 따른 위장, 포복, 약진, 참호 구축 훈련은 생존과 직결되는 훈련이다. 그중 참호 구축 훈련은 가장 중요하다. 야전삽의 작업량과 피해는 반비례한다. 방어할 때뿐 아니라 공격 할 때에도 삽은 휴대해야 한다. 상황에 따라 개인호로 전환할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대 군견인 셰퍼드 ‘와치’와 ‘발드’도 훈련에 초대했다. 개의 얼굴은 코가 3분의 2를 차지한다. 사람의 후각세포는 500만 개지만 개는 40배가 넘는 2억 개다. 말하자면 개 코에 비하면 사람 코는 코도 아니다. 나는 개 두 마리를 골짜기에 묶어둔 채 은밀히 통과하는 훈련을 계획했다. 취각과 호흡 조절을 위한 훈련이었다.

이틀 전부터 나는 대원들에게 금연할 것을 주문했다. 가능한 한 마늘, 김치 등 후각을 자극하는 음식도 먹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만약 먹었다면 치약에 소금을 첨가해 양치질을 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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