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원제 : 내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을 위하여)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이진삼 장군 / © 뉴스티앤티

낮엔 비트에서 잠을 자고

북편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양지마을이라는 곳이었다. 정말로 날근터에서 양지터로 넘어간 거였다. 비무장지대는 그나마 잡목으로 우거져 있었으나 북방한계선 북쪽은 벌거숭이로 황폐화 돼 있었다.

22:00경, 462고지 우측 능선을 통과, 그곳의 11시 방향 약 300m 이격 지점 최상단에 적의 GP811이 위치해 있다. 야음이라 식별이 곤란했다. 그래도 먼저 그곳을 무사통과해야만 했다. 만의 하나 발각 시엔 퇴로를 따라 후퇴해야 했기에 어느 누구도 돌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내가 맨 앞으로 나섰다. 최대한 몸을 굽혀 정숙보행을 하면서 2시 방향으로 전진, 북한강을 만나면 강줄기를 타고 오를 예정이었다. 강 언저리엔 지뢰나 부비트랩 등이 없는 것으로 판단, 전진하여 금성천 언저리에 도착했다. 강어귀에 도착하자 나는 포복자세를 명했다.

00:10경, 금성천 도하지점에 도착, 옷을 벗고 튜브를 몸에 끼고 강을 건넜다. 강폭은 좁았으나 의외로 수심이 깊었다.

00:50경, 대안에 도착, 튜브를 은닉하고 11시 방향으로 1시간 가량 행군, 능선을 타고 용호마을 우측으로 빠져나가 목표인 적의 13사단 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백태산이 김의행의 오른팔을 꽉 붙들고는 그의 군화 앞을 가리켰다. 지뢰였다. 모두는 긴장했다. 지뢰 지대를 피하기 위해 계곡과 개천으로 우회하여 물을 건너며 전진했다. 힘은 배나 들었다. 그러나 어렵지 않게 전진할 수 있었다. 금성천 계곡 북쪽에 펼쳐진 골짜기, 너럭바위 그리고 실개천 등등 훈련을 했던 우이동 계곡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철수로가 보장되면 죽지 않는 한 돌아갈 수 있기에, 낯익은 그곳은 왠지 철수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약 50m 앞에 적의 잠복초소가 있었다. 나는 정지하고 낮은 소리로 백태산과 김의행에게 무성무기로 처치할 것을 지시했다.

 

“처치하자!”

처치 후, 적정(敵情)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나는 대원들에게 잠복초소 교대 병력이 철수하기를 기다리자고 하고 졸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비트 구축을 명했다. 숙영은 물론 때에 따라선 차후 집결지가 될 수 있기에 지형 평가 다섯 개 요소를 고려해 적이 생각할 수 없는, 은폐 엄폐가 잘되는 곳에 삽을 꽂았다. 10분이 채 안 돼서 비트가 완성, 교대로 휴식할 수 있었다. 잠자고 있는 일행을 보며 나는 비로소 확신이 들었다. ‘그래, 배반을 하려고 했다면 벌써 했을 거야, 적의 GP811을 지날 때.’ 의심했던 것을 미안해하며 나는 그들을 흔들어 깨웠다. 어느덧 아침이었고 우려했던 대로 적의 초소는 야간 매복 초소가 아닌 24시 고정 초소였다.

12:00경, 초소 우측 방향에서 적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민경대원 15명이 지뢰 매설을 위해 총을 땅에 내려놓고 삽과 곡괭이로 작업을 시작했다.

13:50경, 위치를 이동했다. 몇 걸음 옮기지 않았을 때였다. 박상혁이 부주의로 나뭇가지를 밟았고, 그 바람에 약 30m 지점에서 “뉘기야?” 하는 반응과 함께 북한군 하나가 왔다. 바짝 다가간 백태산의 단도가 적병의 목울대를 쳤다. 동시에 또 다른 북한군 병사 둘이 다가왔다. 나는 손가락 하나, 그리고 다섯을 좌우로 올리며 공격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적병을 급습했다. 이어서 대원들의 PPS-43 소제 기관단총 60여 발이 난사되었다. 방어용 수류탄 6발과, 반탱크 수류탄 1발도 투척됐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적들은 우왕좌왕했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우리를 당해내지는 못했다. 나는 조준사격을 명했다. 살아남은 적 2명이 골짜기로 달아나며 20여 발의 사격을 가해왔다. 나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실탄도 바닥난 데다 곧 적의 부대가 출동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배탈이 났다. 개울물을 마셨던 게 탈이 났다. 티내지 않으려 참았으나 나중엔 배가 너무 아파 배를 움켜쥔 채 몸을 펼 수가 없었다. 건빵 하나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14:00경, 적병의 매복이 예상됐던 지점을 무사히 통과했다.

14:40경, 마침내 금성천 어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 후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바위 뒤 숨겨놓은 튜브와의 거리는 50여 미터. 나는 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든 뒤, 손가락으로 숨겨놓은 튜브 쪽을 가리켰다. 셋은 동시에 움직였다. 튜브를 꺼내 물속으로 뛰어들어 잠수했다. 총알이 날아들었다. 천만다행으로 급류를 극복, 도하했고 적의 총소리도 그쳤다.

15:30경, 군사분계선을 넘어 212GP 좌전방 지점으로 복귀했다.

 

1차 작전 결과

1차 응징보복작전에서는 군관 1명을 포함 13명의 적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보복작전이 최초로 이루어진 작전이었다.

김의행과 함께 국군통합병원을 찾았다. 김의행은 생포 당시 생긴 총상이 도져 팔에 고름이 차 있었다. 진료부장은 김의행에게 당분간 무리한 운동을 금하고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급성 위궤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내게 술, 담배, 커피를 삼갈 것을 권했다.

 

2차 응징보복작전

1967년 10월 14일 토요일, 1차 작전 17일 뒤였다. 2차 작전도 1차 작전에 이어서 바로 실행할 예정이었으나 계속된 나의 위통으로 17일 후로 미루어졌다. 적의 사단장 살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이번에는 목표를 수정했다. 잠복초소, 병력 집결지, 북방한계선 일대의 경계 실태, 금성천 및 적 13사단 지역 등을 정찰한 뒤, 적 807GP의 기습에 목적을 두었다. 작전의 목표가 점령지 탈환에 있지 않고, 보복을 위한 단순 인명 살상에 있었으므로 적의 병력이 밀집돼 있는 GP가 목표로서 최적이라 판단되었다.

 

함정과 지뢰

18:30경, 강원도 화천, 아군 7사단 2대대 5중대 전방인 대기 지점을 출발했다. 나는 김의행 대신 작전에 투입된 이기철을 포함 다른 대원들과 함께 장비를 최종 점검했다.

19:00경, 안내장교 1, 병사 5명과 작별, 나를 포함한 4명이 북상했다. CT 874 425 지점부터 월광을 고려, 개활지가 펼쳐져 적에게 노출될 것을 우려하여 튜브를 끌고 포복으로 1㎞를 이동했다. 2시간이 넘게 소요됐다. 도하 장소는 1차 작전 때보다 다소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다시 1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23:50경, 도하 지점인 새말과 피루개 사이에 위치한 소성동에 도착, 만 17일 만에 또다시 금성천에 이르렀다.

02:00경, 우이동 계곡을 닮은 계곡을 따라 북상하던 중, CT 862 440 지점에서 적들이 파놓은 반쯤 매몰된 호와 끊어진 전화선을 발견했다. 나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우리의 1차 작전으로 인해 적의 부근 경계가 더욱 강화돼 있음을 알았다.

03:00경 다시 포복을 개시했다.

05:00경, CT 865 445 지점을 통과하는데 길 막바지 부근에 수저통 모양의 목함지뢰가 있었다. 제일 먼저 이를 발견한 백태산이 “뜨로찔!”을 외치면서 일행은 옆으로 피했고 당황한 이기철이 옆으로 엎드린다는 것이 그만 목함지뢰를 덮쳐버리고 말았다. 1초, 2초, 3초……, 그런데 터지질 않았다. 그러자 백태산은 조심스레 이기철에게 다가가 덮친 수저통 모양의 지뢰를 침착하게 빼냈다.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만약 터졌다면 이기철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모두는……. 대원들은 초주검이 되었다.

05:00경, 간신히 북방한계선 CT 866 455 지점을 통과했다. 도강에 긴 포복 이동, 그리고 지뢰 소동까지. 모두가 악조건이었다.

08:00경, 9시 방향, 불과 100m 거리에서 적의 행렬이 포착됐다. 중대 병력쯤 돼 보였다. 적 70여 명이 능선을 따라 수색작전을 실시하면서 그중 약 20명이 공작조를 추격 중이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서둘러 적과 반대 방향으로 하산할 것을 지시했다.

09:00경, 은신했던 곳을 출발, 침투로를 따라 하산하여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작전을 포기하고 돌아간다 해도 해가 진 무렵이나 가능했기에 또다시 은신을 위한 비트를 구축했다. 적의 13사단 지역 정찰엔 실패했지만, 퇴각하는 길에 계획했던 적의 807GP를 습격할 목적으로 능선을 따라 다시 행군했다. 그러나 퇴각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1차 작전 후 적들이 곳곳에 파놓은, 지름 2m에 깊이 3m 정도의 함정들과 그 지역 일대에 매설해놓은 지뢰 중 대인 지뢰 7발을 제거하고 70m 가량을 전진했다. 그러나 도저히 지뢰 지대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이격 거리 40m까지 포복으로 다가가 살피고 복귀로를 따라 이동했다.

04:00경, 마침내 은닉해 두었던 튜브를 꺼내 금성천을 건넜다. 초소에 있던 북한군이 사격을 가해왔으나 물속으로 잠수하면서 도하,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다.

 

2차 작전 결과

적진에서의 단기 작전은 우리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전과 획득에 치중해서는 안 된다.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2차 응징보복작전에서는 다만 북방한계선 부근 적의 경계 실태 확인과 적의 비무장지대 장애물 실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작전 시 지휘자는 식량과 탄약 등 전투 지속 능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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