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심사대령 진급심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심사위원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화로 여기저기서 알려왔다. 위원장 양원섭 소장을 비롯하여 전두환 준장, 김재명 준장, 우종림 준장, 나동원 준장, 김영동 준장, 배성순 준장 등 7명의 장군이 심사위원이었다.진급발표 후 감찰감 양원섭 장군 방에 차규헌 소장, 전두환 준장 셋이 모여 전화로 나를 불렀다. 진급심사위원장이었던 감찰감 양원섭 장군이 말문을 열었다.“이 중령, 내가 대령 시킨 거 아니야. 이진삼 기록카드를 들고 모든 위원들이 진급시켜야 한다고 해서 제쳐 놓았어. 만약 안 되면
버티고 살아남다“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15사단에서 13개월이 지날 무렵, 1974년 4월부터 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버티고 살아 있으니까 서울 육군본부의 장군, 대령 선배들이 ‘이진삼을 빨리 서울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진급시켜야 한다’는 소식이 전방까지 들려왔다. 대령이 되어야 하는데 15사단의 부연대장으로는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7사단, 15사단, 27사단과 군단까지 대령 진급 해당자들이 40여 명이었다. 부연대장으
노란 편지의 의미삶이란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더러 맴돌기는 하지만 한 자리에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흘러가는 것이고 흘러갈 수밖에 없다.1973년 3월 23일, 윤필용 사건으로 15사단 부연대장으로 쫓겨 가기 일주일 전 일요일 오후, 8사단 박노영 사단장은 주말을 빌어 전방으로 온 우리 가족을 관내인 산정호수 근처 조용한 식당으로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사단장이 대대장 가족을 불러 식사하는 예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 자리에서 박 사단장은 내게 “서울 소식을 들었나?” 하고 물어왔다. 못 들었다고 대답하자 윤필용 사건을 알려주었다.
난민 수용소주월 한국군에 월남은 쌀을 지원하도록 각서(覺書)에 포함되어 있었다. 사시사철 월남은 이모작으로 쌀이 풍부하였으며 보리밥 신세인 한국 장병들은 마음껏 먹었다.주월 한국군 군수사령부로부터 1966년 7월, 10개월간 먹고 남은 쌀을 기증하기 위하여 월남 피난민들을 수용하는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되는 행사에 참석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기동대장으로 대원들을 총동원하여 월남 경찰과 합동으로 테러 위협으로부터 방호하기 위하여 행사 시작 2시간 전에 행사장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의 입구에서 비노출로 경계를 하고 있었다. 행사장에는
신원 조사월남에서의 보직은 맹호사단 기동대장 겸 100군수사령부 보안부대장으로 소령 직책이었다. 국내에서의 특공대장 경력을 고려하여 한국과 우방국의 VIP에 대한 경호 임무인 기동대장 직책과 월맹군과 베트콩 등, 적의 정보를 수집하여 맹호사단에 제공하는 위험하고 어려운 직책이었다. 짧은 기간에 임무를 분석하고 대원들의 특기를 고려하여 3개 팀을 구성하였으며, 3개월 후부터는 맹호부대 정보참모부는 전투 정보를 수집하고, 보안부대는 민관군 특수 정보를 수집하기로 협조하였다.맹호사단은 홍천에서, 100군수사령부는 용평에서 각각 파월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