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진행된 제20대 충남대학교 총장임용후보자 선거에서 사범대학 교육학과 김정겸 교수가 1순위 총장임용후보자로 선출됐다. 1차 투표에서 34.8%(총 환산 280.7표)의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한 김정겸 당선자는 결선 투표에서 52.88%(총 환산 400.77670표)를 얻으며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아직 교육부의 검증 과정이 남아 있지만, 특별한 瑕疵(하자)가 없는 한 내년 2월 모교 출신으로는 세 번째로 김정겸 당선자는 충남대학교 총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특히, 다른 후보들과 달리 두 번째 총장 도전에 나선 김정겸 당선자
대통령(大統領)은 '크게 통치하는 영도자'란 뜻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낸다고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권위적이고 고압적이다. 역대 대통령의 권력의 그림자가 그만큼 크다. 이번 선거도 유력후보 중 당락에 따라 한 명은 청와대로, 또 다른 한 명은 교도소로 예약돼 있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사전선거가 시작됐다. 닷새 뒤면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이번 선거를 계기로 대통령의 권한과 의미를 생각해 본다.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를 갖는다.행정부의 수반으로서 각 분야별 행정을 처리하기 위하여 법령 집행권을 가진다.각부의 행정을 지휘 감독할 권
2022년 6.1 지방선거를 정확히 211일 앞두고 충남 서산시장 출마 예상자로 자천타천 거론되는 인사들은 7명 정도로 알려졌다.서산시는 지난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2018년 6.13 지방선거까지 2007년 재선거와 2011년 재선거를 포함한 아홉 차례의 선거에서 보수진영이 여섯 차례 승리를 차지했을 정도로 보수세가 강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또한 소선거구제가 도입된 1988년 13대 총선 이후 지난해 21대 총선까지 2014년 재선거를 포함한 열 차례의 선거에서도 보수진영이 여섯 차례 승리를 차지했을 정도로 우위를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사망했다. 향년 89세.노 전 대통령은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해 오랜 동안 병상에서 누워 있었으며, 이날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졌다.1932년 12월 4일 경북 달성군에서 출생한 故人(고인)은 경북고를 졸업하고 육사 11기로 군과 인연을 맺었다. 육사에서 동기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 평생의 정치적 동지가 되었고, 후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이어 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자신의 경북고와 육사 동기동창인 김복동의 여동생 김옥숙 여사와 결혼한 故人(고인)은 육사 졸업 후 육군 보
더불어민주당 대전지역 시구의원 일동이 국민의힘 윤석열 20대 대선 예비후보의 전두환 전 대통령 발언을 강하게 질타하고 나섰다.이들은 24일 ‘독재자 전두환을 찬양하고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윤석열은 국민 앞에 사죄하고 정계를 떠나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윤석열 후보를 맹비난했다.이들은 “지난 19일 윤석열 후보는 ‘전두환 대통령이 잘못한 부분이 있지만, 군사 쿠데타와 5·18만 빼면 정치는 잘했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다. 호남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면서 “반란 수괴로 유죄를 확정 받은 독재자 전두환을 찬
국민의힘 6.11 전당대회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한 ‘보수의 여전사’ 조수진(초선, 비례) 의원이 30일 오후 2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광주·전남·전북·제주 합동연설회에서 ‘호남의 딸’을 내세워 호남 표심을 자극했다.조 의원은 ‘호남의 딸’ 조수진, 최고위원 후보로 이 자리에 섰다“면서 ”이리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했다“며 ”정치부 기자 시절엔 호남이 배출한 유일한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과 ‘김대중의 사람들’을 담당했다“고 밝혔다.그는 “저는 지금 대단히 감개무량하다”고 운을 뗀 후 “호남인에게는 ‘외할머니의 툇마
미래통합당(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의 시·도당위원장 임기가 마무리되는 가운데, 대전과 충남이 각각 추대와 경선으로 임기 1년의 신임 시·도당위원장을 맞이하게 되면서 온도차를 드러내고 있다.대전지역은 당협위원장은 7석 전부 원외위원장이 맡고 있는 가운데, 지난 14일 회의를 갖고 장동혁 유성갑 위원장을 추대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전시당에 따르면, 지난 17일 오후 5시까지 후보 등록이 마감된 가운데, 장 위원장만 단독 후보로 등록하여 일찌감치 차기 시당위원장을 확정지었다.1969년 충남 보령 출생인 장 위원장은 대천고와 서울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위원장 조승래, 이하 시당)이 국립대전현충원의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현판 교체를 환영하고 나섰다.시당은 8일 최영석 대변인 명의로 ‘전두환 현판 교체키로 한 국립대전현충원, 역사 바로 세우는 올바른 결정’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최 대변인은 “국립대전현충원이 현충문에 설치된 전두환 씨가 직접 쓴 현판을 교체하기로 했다고 한다”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모셔진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전두환 현판이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된 것이라”며 “역사 앞에 전두환 씨가 저지른 죄악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에 부족하다
공천이 확정된 미래통합당 장동혁 대전 유성갑 예비후보가 “변치않는 정치인, 실망시키지 않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소감을 피력했다.장 예비후보는 지난 4일 자신의 SNS를 통해 “응원해주시고 힘을 모아주신 덕분에 미래 통합당 후보가 될 수 있었다”면서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장 예비후보는 이어 “법과 원칙이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들고, 잘사는 유성, 교육1번지 유성을 만들겠다”면서 “마지막까지 힘을 모아 달라”고 지지자들과 유성구민들에게 당부했다.한편, 1969년 충남 보령 출생인 장 예비후보는 대천고와 서
4.15 총선이 D-50일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코로나19 확진자가 대전·세종·충남·충북 4개 시·도에서 모두 발생하면서 대면접촉 선거운동 중단을 발표하는 예비후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한 각 당의 공천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면서 현역에 도전하는 신예들의 선전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먼저 대전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하명 수사 의혹으로 기소된 황운하 중구 예비후보의 공천 여부가 첨예한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유성을에서 만난 충남대 법과대학 선후배 사이인 4선 관록의 이상민 의원 vs 文心과 許心을
더불어민주당 김종남 유성을 예비후보가 문재인 대통령 후보 선거캠프에 함께 했던 관계자와 1987년 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세대를 중심으로 한 120명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경선을 대비한 막판 총력전에 나섰다.이들은 지지선언문을 통해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고 부패하고 무능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 맞서 촛불을 들었던 평범한 시민들이라”면서 “대전에서 유일하게 현역의원과 경선을 진행하는 여성정치신인 김종남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혁신공천의 성공이라”며 김 예비후보 지지를 표명했다.이날 지지선언문을 낭독한 노민정(20)
장동혁 前 광주지법 부장판사가 23일 자유한국당 대전시당에 입당신청서를 제출한 후 4.15 총선에서 대전 유성갑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장 前 부장판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나라는 원칙 위에 세워져야 하고 그 원칙은 함부로 흔들려서는 안된다"며 "원칙을 바로 세우고 원칙을 되돌려 놓기 위해 정치를 결심했다"고 밝혔다.이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소중히 생각하는 한국당에서 정치의 처음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해 입당했다"며 "이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알지만 원칙을 지키기 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묵묵히 가겠다"고 다짐했다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1988년 1월과 2월,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는 연희동 자택으로 나를 불러, 보안사령관직을 맡을 것을 두 번에 걸쳐 권유했다.“저는 보안사령관 안 하겠습니다. 제가 보안부대 8년, 정보사령관 2년, 10년간이나 정보계통에 있었습니다. 저는 야전(전투) 지휘관 하겠습니다.”“박준병 장군 보안사령관 했는데 후에 어떻게 되었지?”“1979년 10·26 때 20사단장으로 서울 태릉으로 출동했다가 보안사령관 끝내고 예편, 민정당으로 충북 보은·영동·옥천군 국회의원을 하고 있습니다.”“안필준 장군은?”“6군단장 끝내고
산악 3군단장★★★1987년 1월 13일, 중장으로 진급하자 전두환 대통령은 나를 서울 거여동에 있는 공수특전사령관으로 내정했다. 나는 참모총장을 방문하여 말했다.“저는 9공수참모장과 9공수여단장을 했습니다. 전방 군단장으로 보내주십시오.”“어제 대통령께 결재 올리면서 결정했는데 어떡하나?”“총장님, 고생은 되겠지만 저는 많은 병과를 지휘 통솔하는 정규 군단장을 하겠습니다. 보병, 포병, 공병, 기갑, 통신 등 정규 작전 부대를 지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21사단과 12사단 지역 땅굴을 발견하겠습니다.”“정 그렇다면, 전화로 보고하
서울의 봄1980년 봄, 소위 ‘서울의 봄’이라 일컫던 분위기는 점점 냉정을 잃어갔다. 1980년의 봄은 5·17 계엄령 확대로 이어졌다. 당시의 국내 상황을 안일하게 보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은 것 같다. 하지만 국가안보에 관계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만 부르짖었지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정치인들은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선동하고 부추겨 혼란을 가중시킬 뿐 수습하려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구제(救濟)1979년 12·12 오후 7시 40분, 정승화 참모총장 내외와 이재천 소령은 한남동 총장 공관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부관 황진하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건 그때였다. “보안사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 보고 건이 있어 공관을 방문한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남동 공관으로 대령 몇 명과 수사관들이 방문했다. 그때 수행 부관이었던 이재천 소령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과의 통화를 연결 중이었다. 순간, 권총 2발이 전화를 걸고 있던 이 소령에게 발사되었다.
혼돈의 시기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을 완수한 후 민정에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고 공약을 했다. 국력을 키우고 부강하게 만든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집권 기간의 절반 즈음에 유신헌법을 만들어 나라를 더 발전시키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유신’이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직접선거제’를 ‘간접선거제’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7년 후 유신체제는 무너졌고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1979년 10월 18일, 경제가 침체된 부산과 마산에서는 참다못한 시민들이 봉기했다. 이른바 ‘부마항쟁’으로 일컬
오기로 윤필용 예비역 장군을 찾아가다감옥에서 나왔지만 윤필용 장군은 여전히 감시를 받고 있었다. 나는 전투복을 입고 대방동에 살고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싶어 몸을 사렸지만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벨을 눌렀다. 낯익은 운전기사가 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고 말했다.“아무도 못 오시는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면서 문을 열었다. 현관까지 나온 윤 장군도 나를 확인하고는 집안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해관 엄마, 이진삼 대령 왔어”윤 장군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형님, 고생하셨습니다.”“이
진급심사대령 진급심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심사위원 명단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화로 여기저기서 알려왔다. 위원장 양원섭 소장을 비롯하여 전두환 준장, 김재명 준장, 우종림 준장, 나동원 준장, 김영동 준장, 배성순 준장 등 7명의 장군이 심사위원이었다.진급발표 후 감찰감 양원섭 장군 방에 차규헌 소장, 전두환 준장 셋이 모여 전화로 나를 불렀다. 진급심사위원장이었던 감찰감 양원섭 장군이 말문을 열었다.“이 중령, 내가 대령 시킨 거 아니야. 이진삼 기록카드를 들고 모든 위원들이 진급시켜야 한다고 해서 제쳐 놓았어. 만약 안 되면
버티고 살아남다“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아서 강한 것이다.”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15사단에서 13개월이 지날 무렵, 1974년 4월부터 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버티고 살아 있으니까 서울 육군본부의 장군, 대령 선배들이 ‘이진삼을 빨리 서울로 나오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진급시켜야 한다’는 소식이 전방까지 들려왔다. 대령이 되어야 하는데 15사단의 부연대장으로는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7사단, 15사단, 27사단과 군단까지 대령 진급 해당자들이 40여 명이었다. 부연대장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