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일대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 / 뉴스티앤티

혼돈의 시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을 완수한 후 민정에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고 공약을 했다. 국력을 키우고 부강하게 만든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집권 기간의 절반 즈음에 유신헌법을 만들어 나라를 더 발전시키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유신’이라는 것이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직접선거제’를 ‘간접선거제’로 바꾼 것에 불과했다. 7년 후 유신체제는 무너졌고 국가적으로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18일, 경제가 침체된 부산과 마산에서는 참다못한 시민들이 봉기했다. 이른바 ‘부마항쟁’으로 일컬어지는 현장을 목격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이래선 안 된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어쩌면 4·19보다 더 큰 회오리가 될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캄보디아에선 2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라고 100만~200만 명을 못 죽이겠느냐”고 끼어들었다. 김 부장은 불길함을 감지했고 김계원 비서실장을 만나 “차지철이 저러면 안 되는데”라며 걱정했다. 그리고 8일 후인 10월 26일 밤 10~11시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시해를 당한 불행한 소식이 전해졌다.

전군은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국무총리로 대임(大任)을 맡게 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27일 새벽, 국방부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주재,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급히 부대에 복귀했다. 나의 사무실에 20사단의 박준병 사단장이 와 있었다. 우리 부대를 사단사령부로 정하고 태릉 배 밭에 4개 연대를 배치시켜 놓았다. 북한의 도발에 응전태세를 갖추고 만약에 있을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던 나로서는 마음이 몹시 착잡했다. “불행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다. 10·26 당시가 그러했다. 1979년 초부터 몰아닥친 2차 오일쇼크로 우리의 경제는 몹시 휘청거렸다. 그 이전인 1973년의 1차 오일쇼크는 그럭저럭 버텨냈지만, 1979년에는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의 규모가 커져 있던 터라 사정이 달랐다. 설상가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우리 사회는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군의 임무가 막중했다. 우리의 사정에 북한의 김일성이 쾌재를 부를 게 틀림없다. 군은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우리 국민과 국토를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야 국민이 안심할 수 있기에 어느 때보다도 군 내부의 단결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각각 육사 2기와 5기로 친분이 두터웠다.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던 그 시각, 근처에 있던 정 총장은 김 부장과 같이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이후 정 총장이 계엄사령관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지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정 총장은 자신이 대통령 시해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점을 의식, 자진해서 합수부(合搜部) 수사관을 불러 조사를 받았지만, 그 문제는 그렇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육군의 최고책임자가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시해당하는 현장 주변에 있었다면 도의적 책임을 져야 했다. 정 총장이 김 부장의 범행 기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현장에 갔더라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눈치 채지 못했다면 적어도 이용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정 총장이 김 부장의 식사 초대를 받아 사건 현장 바로 옆 건물에 가 있던 상황에서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김 부장의 부하들은 정 총장이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리적 불안감을 덜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 사건 직후 정 총장은 법적이든 도의적이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했다. 그럼에도 계엄사령관이 된 정 총장은 노재현 국방장관과 더불어 새로운 권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했다. 두 사람은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혼돈에 휩싸인 위기의 나라를 이끌어갈 의지와 힘은 부족해 보였다. 그런 가운데 12월 12일 군 내부 충돌은 우리 사회의 안정을 오리무중으로 몰아넣었다. 이른바 신군부 세력이 권력의 중심축으로 급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12·12사태 시 현장에 있지 않아 내용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12·12사태의 전모는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보안사령관과 합동수사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던 전두환 장군은 국가원수를 시해한 김재규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수사할 수밖에 없었다. 전 본부장으로서는 합수부를 지휘하는 직속상관인 정 총장을 수사하는 절차와 방법에 어려움을 겪던 중, 도의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해 참모총장직(계엄사령관)에서 물러나 합참의장으로 올라갈 것을 권고하고자 했다. 정 총장 스스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실권 없는 합참의장으로 옮겨가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치달았다. 총장 공관에서 충돌이 발생했던 것이다. 돌발 사고였다. 그때 만약에 정 총장을 강권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면 전투 요원이 정 총장 공관으로 갔을 텐데 이학봉, 우경윤 등의 대령들이 모시러 갔다. 다행히 최 대통령이 사후 승인을 하는 후속 인사 조치를 단행해 군 지휘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12·12사태를 두고 쿠데타 운운은 사실과 다르다.

때를 같이하여 사회 각 분야 여기저기에서 민주화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를 수용하고 조절할, 현실적인 권위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상황은 점점 신군부 세력의 등장으로 전개되었다.

 

장군이 되다

1979년 12·12 사태가 일어나기 몇 시간 전인 오후 2시 30분, 정승화 참모총장의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대장님, 오늘 날씨 좋습니다.”

“그래. 날씨 좋다.”

“대대장님, 돼…… 돼…… 됐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면서 몹시 격앙되어 있었다.

“뭐라고?”

나는 되물었다.

“됐…… 됐습니다, 장군.”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았다. 전화 끊어.”

나는 소문이 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최종 결재권자 최규하 대통령 결재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진급 장군 명단을 가지고 정 총장이 청와대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온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은 육사 28기로 내가 8사단 21연대 3대대장 재직 시, 9중대 화기소대 초임 소대장이었다. 직접 모셨던 대대장이 1차로 장군이 되었으니 얼마나 흥분 되었겠는가. 지금도 그때 그의 격앙된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날 그의 전화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1979년 12월 12일, 육사 15기 동기생 중 최초로 3명이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결재를 받고 1980년 1월 1일 장군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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