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종年終- 해마다 이맘때면 ‘세월’과 ‘나이’ 같은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세상에 아무리 잡아도 가는 게 시간이고, 입 다물어도 먹는 게 나이 아니던가. 입춘방 써 붙이고, 장맛비에 우산 대여섯 번 들고, 한가위에 고향 다녀왔을 뿐인데 문득 소설과 대설 사이의 한겨울이다. 이제 오가던 그 길에 가루눈이나 함박눈 내려 쌓일 터. 그러면 사람들은 눈 털며 음식점이나 술청에 모여 한 해를 회억할 것이다. 송년이나 망년, 연종회 그 무엇이라 부르든 어김없이 동석하는 상전이 있는데 바로 ‘술’이다.쇠퇴하고 번성함은 정해진 바가 없어,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면 나는 술을 많이 마신다. 집이나 술청이 아닌 백마산 중턱에서 마신다. 조부모님과 두 백부님 부부, 모친께서 영면하시는 선산- 사실 이런 일탈은 5년 전 귀향하고부터 연례화되었다. 그리고 이태 전부터 눈이 적게 내린다는 날까지 연장되었다. “네 엄마가 돌아가셨다...” 89세의 처,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하고 알아보던 중에 11월 21일 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거주지인 충북 영동에서 대전까지 택시로 나가면서 내내 ‘벙어리 장갑’의 회억에 빠졌다, 나는.하느님, 저에게 /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 받
만산홍엽- 불현듯 산이 붉게 물드는 늦가을이다. 봄꽃 피었다 들꾀고, 삼복더위에 죽겠다 들레다 보니 상강이 코앞이다. 이제 색색의 낙엽들 위로 서리가 내릴 터. 벗고 버리며 겨울 채비하는 나무들과는 달리 사람들은 두꺼운 이불과 외투를 꺼낸다. 15×24=360.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은 스스로 돌면서 하루를, 달은 지구를 돌아 한 달을 각각 만든다. 여기에 대괴가 해를 크게 한 바퀴 돌면 1년이니 360도 궤적이 24절기다. 이는 한 계절에 6개씩 네 묶음이 일습이다. 상강 다음이 입동이니 가을의 회두리에 이른 것이다.돌아가는 개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아!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쓸 수만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소설이 된 텐데! 자, 작가인 당신에게 그것을 줄 테니 글로 한번 써보시오. 그 순간 반전反轉이 이루어진다. 작가를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던 사람이 동시에 그를 ‘말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 싸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제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말과 이야기- 말은 입말과 글말로 나뉘며,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글보다 말이 먼저고, 사실은 허구에 앞선다. 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아마 하나의 기억일 것이다. 딱히, 이름 붙이지 못할 경험들을 안고 산다. 막연하나마, 어떤 원초적인 힘들- 더위, 추위, 아픔, 달콤함-이 떠오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 역시 기억된다. 그러나 동사나 명사는 전혀 기억되지 않는다. 어릴 적, 인간은 말이 존재치 않는 솔기 없는 경험을 산다. 말의 부재는, 모든 것이 끊김 없이 이어져 있음을 뜻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동시에 이해될 수 있는 이상적인 언어에 대한 최근의 희망은, 어쩌면 이 기억 없는 상태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 비 한 방울 나리잖는 그 땅에도 /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 내 목숨을 꾸며 쉬임없는 날이여 //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 제비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 한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 바랍결 따라 타오르는 꽃城에는 /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보리라 – 이육사 시「꽃」전문(1945년 유고작)인도의 고대 경전『바가다드 기타』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아홉 개의 구멍이 난 상처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謫客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牧民에는 전혀 뜻이 없고 오로지 국마國馬를 살찌우는 목마牧馬에만 신경썼던 역대 육지 목사牧使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없이 말을 보리밭으로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馬政.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 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형의 땅을 버리고 싶었다. 찌든 가난과 심한 우울증밖에는 가르쳐준 것이 없는 고향, 그것은 비상하려는 그의 두 발을 잡아끌어당기는 깊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달에 다녀왔다. 우리가 몸소 경험하는 시간은 수십 년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가진 역사 기록은 수천 년에 달하며, 우리가 발굴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화석은 수십억 년 전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태가 매우 온화한 우주의 일부분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그 경험은 더 극단적인 환경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신뢰할 만한 지침이 아닐 것이다. - 존 배로《무한으로 가는 안내서》(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11장 영원한 삶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전통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그것들이 위협적인 이유는 비실재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재의 중심에 집을 갖지 못하면, 거주처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고 무존재의 비실재적 속에서 스스로가 상실되었다.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존 버거 산문집《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24절기의 소서와 대서, 초복과 중복의 7월- 보름마다의 절후와 열흘씩 세 번 드는 복伏은 말만 들어도 숨이 막힌다. 그런 철이면 휴가를 떠난다, 사람들은. 몸과 마
바깥에는 불이 폭풍처럼 번지고 있었다. 드레스덴은 하나의 거대한 화염이었다. 이 하나의 화염이 유기적인 것, 탈 수 있는 모든 것을 삼켰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걱정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드레스덴은 이제 달 표면 같았다. 광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은 뜨거웠다. 그 동네의 모든 사람이 죽었다. 뭐 그런거지. - 커트 보니것《제5도살장》1945년 2월 13일- 그날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1922-2007)은 독일군 포로로 드레스덴의 외곽 제5도살장 지하에 있었는데 영국과 미국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해, 13만
예측불허의 삶! 서스펜스와 코미디, 슬픈 공감: 장르에 갇히지 않는 새로운 가족희비극- 봉준호(1969- ) 영화감독의 이 2주일 만에 1천만 관객을 돌파할 기세다. 지난 5월 30일 개봉 이후 4일차에 336만을 동원했고, 예매율 1위를 고수하고 있으니 시간문제다. 이미 2013년의 ‘설국열차’가 935만, 2006년 ‘괴물’이 1,091만, 2003년 ‘살인의 추억’이 6백만을 기록했으니 봉감독은 믿고 보는 국민감독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기생충’은 제72회 칸국제영화제 최고의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올해 칸국제영화제
사진의 진짜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활동에서 생겨나기 때문인데, 형식의 활동이 아니라 시간의 활동이다. 사진은 회화가 아니라 음악에 더 가깝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앞에서 사진은 인간이 실행하는 선택에 대한 증거라고 말했다. 이때 선택이란, X와 Y 중에 무엇을 찍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 아니라, X순간에 찍을 것인가 Y순간에 찍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 존 버거《사진의 이해》1년 중에 사진을 가장 많이 찍고, 찍히는 달은 어느 달일까? 아마도 가정의 달 5월이 아닌가 한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 연한 녹색이 나날이 번져 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
사실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들이 역사에 남는 것이다. 한 가지 잘못된 생각이 우리에게, 인간에게 부여된 기쁨과 평화의 총합산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요한 호이징가(1872-1945)《중세의 가을》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하늘이 점차 맑아진다는 청명의 4월 첫 주말 어떻게들 보내셨나요? 저는 구순의 친부를 모시고 대청댐으로 나들이 갔습니다. 회갑의 외아들은 충북 영동으로 귀향한 지 5년인데, 그곳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이태 전
영광을 찾는 자, 사유의 음유시인, 여행자여! 인생은 하나의 여행이며, 여성의 자궁에서 나와 대지의 자궁으로 되돌아가는 자는 모두 여행자이다. 인류여, 너야말로 영원한 여행자이다. - 벵자맹 가스티노《철도생활》봄은 남녘의 낮은 땅부터 오르고, 가을은 북방의 산부터 내려오는 법. 제주 유채꽃과 남녘의 산수유, 매화가 한창인 봄이다. 곧 개나리와 진달래, 목련과 벚나무 따위들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다. 이파리보다 앞서는 봄꽃- 겨우내 삭풍과 혹한을 이겨낸 노고의 대가인 그것은 바로 승전의 환호성이다. 사람들은 지극히 성스럽고, 아름다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