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만산홍엽- 불현듯 산이 붉게 물드는 늦가을이다. 봄꽃 피었다 들꾀고, 삼복더위에 죽겠다 들레다 보니 상강이 코앞이다. 이제 색색의 낙엽들 위로 서리가 내릴 터. 벗고 버리며 겨울 채비하는 나무들과는 달리 사람들은 두꺼운 이불과 외투를 꺼낸다. 15×24=360.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은 스스로 돌면서 하루를, 달은 지구를 돌아 한 달을 각각 만든다. 여기에 대괴가 해를 크게 한 바퀴 돌면 1년이니 360도 궤적이 24절기다. 이는 한 계절에 6개씩 네 묶음이 일습이다. 상강 다음이 입동이니 가을의 회두리에 이른 것이다.

돌아가는 개미는 구멍 찾기 어렵겠고 / 돌아오는 새는 둥지 찾기 쉽겠구나 / 회랑에 가득해도 스님네는 싫다 않고 / 하나로도 속객은 많다고 밉다 하네 – 당나라 정곡의 한시.「낙엽落葉」

땅의 개미와 하늘의 새들은 묵묵히 제집을 드나들며 봄과 여름을 보냈다. 가을철 역시 더디거나 빠른 집 찾기 마다하지 않고 엄동을 준비한다. 승려들은 회랑에 가득한 낙엽을 대수롭지 않게 빗자루질 하지만 대중은 야단법석이다. 야속하고 무심한 세월이 또 이렇게 가는구나! 대박 바라던 천박하고 급박한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불토에서도 신세 타령이다. 제철 모르면 애나 어른이나 철부지이다. 나이가 성숙함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정언은 참 온당하다.

물고기가 뛰고 소리개가 날으니 / 아래와 위가 하나로다 / 그것은 공도 아니요 색도 아니로다 / 스스로 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니 / 홀로 서 있는 숲 속에 해는 이미 기울었네

조선의 대유학자 이이(1536-1589)는 16살에 어머니 신사임당을 잃었다. 율곡은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의 슬픔에 봉은사에서 불경에 심취했고, 마침내 19세에 금강산의 절집을 찾기에 이른다. 젊은 유학자는 깊은 계곡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을 만나 묻는다. 공석孔釋 중에 누가 더 현자인지요? 노승은 공구는 속인일 뿐이고, 유교에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명제가 있는가? 반문한다.

즉심시불卽心是佛-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는 맹자에 따르자면 “마음이 바로 부처”가 아닌가 합니다. 그러자 즉각 “색의 초월과 공이라는 뜻을 알겠는가?” 되묻는다. 이에 율곡은 앞의 한시로 풀었던 것이다. 연비려천鳶飛戾天 어약우연漁躍于淵-『중용』제12장의 이 경구는『시경』「대아」의 ‘한록’이 저본이다.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감히 죽음에 대해서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 공자『논어』제11편 선진

그토록 사랑하고 따르던 친모를 잃고서 방황하던 율곡은 불교를 통해 위안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음을 깨쳤음인가? 생사일여 불이문- 이이는 ‘뉘엿뉘엿 해가 기운 숲에서, 스스로 웃음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유교로 돌아왔다. 삶과 죽음을 비롯한 정신과 육체, 형이상과 형이하 그 이분법의 강박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음인가. 훗날 율곡은 성리학의 이기이원론을 실천철학의 입장에서 ‘기’를 강조하였다.

번지가 지혜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의에 힘쓰고, 귀신은 공경하되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수 있다.“ 인仁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인한 사람은 어려운 일에는 먼저 나서서 하고, 이익을 챙기는 데는 남보다 뒤지는데, 이렇게 한다면 인할 수 있다.“ - 공자『논어』제6편 옹야

이이의 ‘솔개와 물고기’와 정곡의 ‘개미와 새’는 동체이명이다. 노자는 『도덕경』전편을 통해서 천인합일의 ‘현동과 현람, 현덕’의 대인을 설파했다. 사람을 넘어서는 사람이면서 사람들 중의 사람인 대인大人은 석지득일자昔之得一者(제39장)의 그 하나를 깨친 현자를 말한다.

유생어무有生於無- 없는 무에서 ‘1’을 얻어 이름을 갖춘 유로 살다가 그것을 버리고 완성에 안주하다가 무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사람을 비롯한 이승의 그 무엇은 죄다 ‘이’다. 있다가 없어지는 그 유와 무가 합친 존재이니 말이다. 사람을 뜻하는 의존명사 ‘이’의 참뜻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지키고 보존하니,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검약이며, 나머지 하나는 천하에 감히 솔선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기 때문에 넉넉할 수 있으며, 천하에 감히 솔선하지 않기 때문에 그릇의 으뜸을 이룰 수 있다. - 노자『도덕경』제67장

지난 주말 91세의 아버지를 모시고 대청호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이태 전 소설에 88세로 영면하셨는데 충북 영동에 사는 외아들이 대전에 홀로 계시는 친부를 모신 것이다. 옥천 군북면의 방아실에서 송어회와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는 자리- 살아생전 친모와 함께 자주 들렀던 식당이었다. 친부의 심기를 조심스레 살피며 술잔을 올렸더니 3잔이나 드셨는데 여전히 빈 옆자리가 쓸쓸하게만 보였다.

83m인 대청댐- 초가을 잦은 태풍에 강수량이 많았던 탓인지 78m나 채우고 있었다. 봄은 남쪽 들판부터, 가을은 북쪽 산부터 시작되는 법. 설악산은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댐 주변의 산들은 가을 보낼 채비를 덜 마쳤다. 천지를 반으로 나눈 호면의 산 그림자. 하늘과 수면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같은 쪽빛이었다. 청산에 학 나른 자국 없고, 강물에 배 지나간 자취 없다 했던가? 아버지께서는 회랑의 낙엽 쓸지 않는 스님의 심정이실까? 이런저런 상념에 말을 많이 늘어놓았더니 넌지시 말씀하신다. 아범아! 나는 괜찮다...

봄비와 장맛비, 그리고 서리와 눈 그 물의 치환이 한 해이다. 이제 문득 나는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렀다. 장하던 빗줄기 같던 패기와 열정의 봄과 여름은 갔다. 문득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산문이 떠올라 속웃음 짓는데 그가 나의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위무한다.

참다운 지혜로써 마음을 가다듬은 사람은 저 호메로스의 시구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후회와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기에 충분하다. 인간은 나뭇잎과 흡사한 것, / 가을 바람이 낙엽을 휘몰아가면, / 봄은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 황제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미 날은 저물어 어두워졌고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월터 호레이쇼 페이터.『페이터의 산문』「철인 황제 마르쿠스 이우렐리우스」

저작권자 © 뉴스티앤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