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한 해의 가장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김래호 작가의 밑줄 이야기] 한 해의 가장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 김래호 작가
  • 승인 2019.11.2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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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연종年終- 해마다 이맘때면 ‘세월’과 ‘나이’ 같은 단어를 자주 떠올리게 된다. 세상에 아무리 잡아도 가는 게 시간이고, 입 다물어도 먹는 게 나이 아니던가. 입춘방 써 붙이고, 장맛비에 우산 대여섯 번 들고, 한가위에 고향 다녀왔을 뿐인데 문득 소설과 대설 사이의 한겨울이다. 이제 오가던 그 길에 가루눈이나 함박눈 내려 쌓일 터. 그러면 사람들은 눈 털며 음식점이나 술청에 모여 한 해를 회억할 것이다. 송년이나 망년, 연종회 그 무엇이라 부르든 어김없이 동석하는 상전이 있는데 바로 ‘술’이다.

쇠퇴하고 번성함은 정해진 바가 없어, / 서로 바뀌며 함께한다. / 소생의 오이밭 가운데 생활이, / 어찌 동릉후일 때와 같았으리오. / 추위와 더위가 대신하고 물러남이 있듯이, / 사람 사는 길도 언제나 이와 같다. / 통달한 사람들은 그 이치를 아니, / 아아 장차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 / 홀연히 한 잔 술을, / 해 저물녘에 즐거이 마시노라. - 도연명 한시「음주飮酒」20수 중 제1수 전문

사철이 바뀌는 자연의 변화처럼 한평생 그 나날에도 영욕이 교차하는 법. 진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던 소생邵生도 나라가 망하자 오이를 키우며 연명했으니 인생이 한결같을 수가 없다. 한결같음은 일정함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일정하면 한결같을 수가 없으니 때에 따라 바뀌는 것이 한결같은 도道이다. 중국 남조의 도연명(365-427)은 몸과 마음 너무 괴롭히지 말고 그저 초연히 술 마시며 삭여내라 권면한다. 여기 그런 경지에 오른 ‘도사급‘의 선인 8명이 있다.

하지장은 배에 탄 듯 기우뚱 말을 타고 / 눈앞이 가물가물 우물에 빠져, 물 속에서 잠을 잔다네. / 여앙왕은 술 세 말을 마시고 비로소 조회에 나가는데 / 길을 가다 술 수레를 만나면 입에서 침이 줄줄 / 주천으로 옮겨 봉해지지 않음을 한스러워 하네. / 이적지는 날마다 흥이 나면 만금을 쏟아 부어 / 큰 고래가 물 마시듯 술을 들이킨다네. / 술 마실 때 청주를 좋아하여 탁주는 피한다고. - 두보 한시「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 술 마시는 여덟 신선의 노래」부분

중국의 시성 두보(712-779)는 당나라의 술꾼 8명의 풍문을 시로 읊었다. 그후 화가들이 그 팔선의 취태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이「음중팔선도」이다. 조선의 정조는 1790년 3월 3일에 규장각의 검서관들에게 그림을 주석해보라 명했는데 열흘간의 말미를 주었다. 아래의 글은 당시 박제가(1750-1805)가 쓴 웅숭깊은 평문이다.

이제 이 그림을 보니 인물의 크기는 겨우 손가락 하나만 합니다. 하지만 술이 거나하여 눈을 게슴츠레 뜬 모습, 만취하여 거꾸러진 모습, 술을 찾아 잔을 잡고 있는 모습 등 자유자재 각양각색입니다. 또 누대, 시내, 초목, 의상, 관冠, 신, 평상, 안궤, 필묵, 이정彝鼎 등속조차도 모두 완연히 취기에 젖은 듯합니다. 그래서 법도나 지키는 세상 저편에 살면서 불로 익힌 음식을 먹지 않는 선계의 천연스런 분위기가 절로 살아 있습니다. 역력한 그 모습에서 손으로 더듬으면 그들의 성명을 알 것만 같고, 냄새를 맡으면 그들의 성정을 이해할 것만 같습니다. - 박제가 수필「음중팔선도」부분

위항도인은 회화의 생동감과 독창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형상만 다르게 그렸다고 정신까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과 자연의 내면을 그려내는 화가의 능력이 중요하다.” 여기에 “맑고 고상하며, 오묘하고 고우며, 시원스럽고 기이한 공통점을 가져 고상한 음주의 멋을 그려내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번잡한 세상사를 훌쩍 털어버리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비록 서자 출신이지만 사회개혁에 대한 대담함이 넘치는 글과 고고한 문학적 향취가 담긴 그림, 절묘한 글씨체의 박제가- 그가 ’음중팔선‘ 중에 어느 인물에 가까운가 묻는다면 나는 다섯 번째 장욱이라고 답하겠다. “술 마시고 쓴 초서의 성인으로 유명하다 / 모자 팽개친 채 맨머리로 왕공들 앞에 나서 / 종이 위에 붓 휘두르니 안개구름 피어나는 듯”한 서예가 말이다. 청나라 나빙羅聘(1733-1799)이 그린 박제가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키는 작지만 체구가 당차고, 눈빛에서 강인한 무인의 기상을 내뿜는 모습이다.

「음중팔선가」에 등장하는 여양왕과 장욱을 합친 인물이 조선의 윤회(1380-1436)였다. 문성文星과 주성酒星의 정기를 함께 받고 태어난 그는 세종대왕 면전에서 대취한 채 붓을 휘두른 당대 최고의 주호였다. 태자의 사부였지만 자주 강연에 빠지고, 늘 숙취를 못 이기며 입궐하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때때로 올라왔지만 세종은 그의 문재를 아껴 절주를 당부할 뿐이었다. “예문관 제학 소인 윤회- 대왕의 명을 받들어 앞으로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실 것을 약조하겠습니다.” 며칠 후 만조백관이 모인 연회장에서 세종이 금잔으로 신하들에게 권주했다.

줄지어 잔을 받잡고, 씻어내며 순배 하는데 저만치 윤회가 쭈뼛거리며 순서를 기다린다. 자리에 돌아온 대신들이 예의 약속을 풍문으로 들은지라 그를 지켜본다. 이윽고 윤회는 진언한다. “전하! 소신에게는 이 잔에 부어 주시면 황공무지...” 맑고 높은 가을 하늘 아래 천포와 백관들의 수염이 휘날리고, 들릴 듯 말 듯 아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환호작약, 포복절도의 웃음꽃이 피어났다. 윤회가 관복의 소매에서 큰 바가지 하나를 꺼내 들어 거안제미- 세종대왕 앞에서 조아린 것이다.

나는 술에 대해서 유달리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찹쌀 막걸리는 물론 거품을 풍기는 맥주, 빨간 포도주, 환희 소리를 내며 터지는 삼페인, 정식 만찬 때 식사 전에 마시는 술, 이런 술들의 종류와 감정법을 모조리 알고 있다. 술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 자체가 아니라 술 먹는 분위기를 즐긴다. 비 오는 저녁 때의 선술집, 삼양이나 대하 같은 고급 요리집, 눈 오는 밤 뒷골목 오뎅집, 젊은 학생들이 정치, 철학, 에술, 인생, 이런 것들에 대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카페, 이런 곳들을 좋아한다. 늙은이들이 새벽에 찾아가는 해장국집도 좋아한다. - 피천득(1910-2007) 수필「술」부분

금아선생은 조지훈(1920-1968)이「술은 인정이라」에서 매긴 ’관주關酒, 주종酒宗’의 경지에 이른 17단이셨다.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마실 수 없는 사람- 주도 18단이 ‘폐주’ 곧 술로 세상을 등진 주당이니 살아생전 최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물과 불을 하나의 원소 속에다 섞는 기막힌 방법을 발명했는데 바로 술이다. 술은 물이며 동시에 불이다. 그 물불을 가리는 것은 인간 저마다의 인품 그 음과 양의 조화에 달렸다.

아무쪼록 한 해의 가장자리에 모여, 넘기는 술잔에 신의 가호가 넘쳐나길 비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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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 2019-11-29 08:09:44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