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달에 다녀왔다. 우리가 몸소 경험하는 시간은 수십 년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가진 역사 기록은 수천 년에 달하며, 우리가 발굴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화석은 수십억 년 전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태가 매우 온화한 우주의 일부분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그 경험은 더 극단적인 환경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알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신뢰할 만한 지침이 아닐 것이다. - 존 배로《무한으로 가는 안내서》(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 11장 영원한 삶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 밤낮을, 해를 한 바퀴 돌아 1년을 만든다. 밤마다 50분씩 늦게 뜨는 달은 대괴大塊를 한 번 돌아 1달을 빚는다. 여기에서 보름마다 드는 절기는 한 계절에 6개씩 24개가 일습이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이래 24절기는 절대적인 다이어그램이었다. 해의 일몰 그 주기와 각도에 따라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하고, 마친 것이다.

바다의 작업반장인 달은 설날(1.1), 삼짇날(3.3), 단오(5.5), 칠석(7.7), 중양절(9.9)의 명절을 갖는다. 음양의 시각에서 동일한 양陽의 숫자가 겹치는 ‘이름을 갖는 날’- 이런 날이면 사람들은 특별한 음식을 장만해 먹으며 별스러운 놀이를 즐겼다. 보름 역시 명일인데 정월 대보름(1.15), 유두(6.15), 백중(7.15), 한가위(8.15) 같은 날이다.

묶어 보면 달은 사람들을 쉬게 하는 편이지만 해는 주로 일을 시키는 쪽이다. 해는 ‘하다’의 명령형 그러니까 뜨는 자체가 어떤 일이라도 하라는 압박이다. 하지만 태양은 여름철에 ‘하사품’ 삼복을 통해 얼마간 일손을 놓고, 지친 몸을 돌보는 특별휴가를 윤허했다. 공간과 시간, 낮과 밤의 지배자 그 해와 달의 운행에 순응하는 삶은 최소한의 행복을 누렸었다. 현자들은 인간이 그런 날들을 잊으면서 점차 불행해졌다고 주창했다.

우리는 언제나 무한함 속에서 길을 열어 나간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이 무한함의 단면들이다. 그리고 이 무한함은 전체도, 슈퍼 대상도 아니다. 항상 무한한 의미의 폭발이 일어난다. 생각 감각까지 포함한 우리의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우주의 마지막 구석까지, 소우주에서 일어나는 극히 찰나적인 사건에까지 탐색의 노력을 이어갈 때 의미는 무한히 주어진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그저 그 어디도 아닌 곳을 헤매는 개미일 뿐이라는 생각을 단호하게 뿌리칠 수 있다. - 마르쿠스 가브리엘 《세계는 왜 존재하지 않는가》7장 무한함을 향한 감각의 긴 여행

해마다 7월의 복중이면 어머니가 생각난다, 나는. 아버지께서는 1960년대 면의 우체국장이셨다. 시외전화를 걸고, 소포를 부치고, 현금을 찾고 넣는 금융과 정보의 허브였던 그곳은 늘 주민들이 붐비었다. 부친은 조회시간이면 매양 당부하셨다. 무겁다고 우편물 버리지 말고, 글 모르는 촌로들께 편지 읽어주고, 감사 치레 농산물들은 일절 받지 말라... 빨간색 자전거의 앞바퀴 위에 제비가 그려진 가방을 싣고 우체부가 떠나면, 모친은 교환원 누나들과 복달임을 장만하셨다.

펄럭이는 천포 아래 닭백숙과 상추나 부추 겉절이, 과일이 차려진 서너 개의 교자상- 태양의 무더위에 지친 우체부들은 ‘일과 밥, 꿈’을 담은 막걸리 사발을 주고받으며, 초저녁 서편의 달을 기다렸다. 닭가슴살 같은 새하얀 달은 ‘개미’들에게 부디 삼복더위 무탈하게 나라며 위무해주었다. 열흘마다 세 번 드는 복날은 하루라도 여럿이 함께 그런 나눔의 시간 가지라고 주어졌을 터. 그런 제철 모르면 애나 어른이나 철부지不知다.

물론 해와 달의 운행을 모른다 해도 사는 데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하루가 24시간이고, 7일이 일주일이며, 한 해가 12달인지... 짜장 우주적 궁금증이 단 한 번도 없었겠는가. 더욱이 어린 자녀가 물어온다면 무어라 답해야 하나 난감한 노릇이다. 요즘 같은 휴가철에 새벽잠 깬 녀석이 쏟아지는 달과 별 그 빛을 보면서 말이다. 이와 견주어볼 만한 일화가 연암 박지원(1737-1805)의〈답창애〉에 나온다.

훈장이《천자문》을 가르치는데 한 꼬마가 갸우뚱갸우뚱 서책과 문밖을 번갈아 보며 읽거나 쓰지 않는 것이었다. 선생은 불러내 세우고 회초리를 들었다. “어찌 큰소리로 따라서 읽지 않느냐?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학동들의 눈이 일제히 바짓단이 걷힌 아이의 종아리로 쏠렸다. “저기요...” 버점 핀 머리통을 긁적거리며 녀석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이어갔다. 요지는 암만 보아도 푸르기만 한데 왜 하늘이 검다고 하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외쳤다. “이것은 내가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이로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말한다면, 이보다 나은 문장을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 박지원 수필〈답경지〉

사람은 자연과 사람에게서만 공부하는 법.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지식이고, 지혜는 자연에서 깨치는 것이다. 지식에 비례해서 지혜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지혜가 출중하다고 지식도 그만하다고 여길 것도 아니다. 대체로 악보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악기를 더 잘 연주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절대음감의 능력자가 있듯이 말이다. 연암은 하늘이 검다면 검은 줄 알아라- 그 따위의 공부는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글자나 문장이 아닌 온몸으로 듣고, 궁리해 혜두慧竇- 그 슬기가 생겨나는 원천의 구멍을 뚫으라는 것이다. 사람의 책도 그런 송곳이지만 자연이라는 서적에도 매달려 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지고의 것은 지식이 아니라 우주적 지성과의 교감이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충분치 않음을 홀연히 깨닫고, 말하자면 세상에는 우리가 철학 속에서 꿈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하고, 신선하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는 것보다 더 분명한 고차원적인 지식이 있을까. 이런 깨달음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는 것과 같다. 어떤 고차원적인 의미에서도 인간은 이 이상으로 깨달을 수가 없다. 태양을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산책》

비록 소로우(1817-1862) 처럼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2년 2개월이나 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떠난다, 잠시라도. 지금, 여기의 단절과 구획을 벗어난 어느 곳에서든 지평선과 수평선과 가까워질 것이다. 거기에서 뜨고 지는 해와 달은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집이나 자리도 없이,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으면서, 번갈아 가며 땅의 모든 것들과 함께 하는 영원한 동반자인 달과 태양-

《보물섬》과《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스티븐슨(1850-1894)의 정언일 것이다. 희망을 갖고 여행을 하는 것이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보다 낫다- 여름철 휴가에서 교감하는 ‘우주적 지성’은 바로 이것이다. 여생의 모든 내일이 희망을 품은 ‘여행’임을 거듭 확인하는 것 말이다. 가족이나 친구는 ‘목적지’ 없는 그 무한한 여정의 도반이다, 달과 해처럼. 부디 멋지고 아름다운 복중의 휴가 이어가시길 비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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