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아!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쓸 수만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소설이 된 텐데! 자, 작가인 당신에게 그것을 줄 테니 글로 한번 써보시오. 그 순간 반전反轉이 이루어진다. 작가를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던 사람이 동시에 그를 ‘말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 싸르트르.『지식인을 위한 변명』제3부 작가는 지식인인가?

말과 이야기- 말은 입말과 글말로 나뉘며,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글보다 말이 먼저고, 사실은 허구에 앞선다. 아기들 그 누구나 구어에서 시작해 문어를 배우며, 날것의 이야기를 익히며 점차 헛것을 구사해 나가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1965년 9월과 10월, 일본 순회강연에서 지식인을 ‘구체적인 진실에 대한 탐구와 지배자에 대한 이데올로기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규정하면서 작가를 거론했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에 따르면 “이야기를 꾸미는 기술을 얼마간 가지고 있는” 작가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지식인이다. ’언어‘를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에서 쓰기 때문이다. 결이 조금 다르지만 바로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에 관한 주석이다. 이데아에서 3단계나 떨어져 있는 ’침대‘를 모방하는 그들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인간의 분별력을 손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것을 소유하고, 자기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것”이 정의正義라는 플라톤의 정언과 견주면 다소 모순된 감이 없지 않다. 작가의 길을 가는 것이 작가의 정의이므로 말이다.

오늘날의 자서전들은 그 대부분이 실상은 과거의 시제를 빌어 쓴 미래의 자기암시에 다름아닙니다. 자서전들은 살아 있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그의 새로운 미래상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꿈꾸게 합니다. 그럴듯하게 꾸며진 이야기니까요. 어두운 과거도 아름답게만 회상되고 과오도 미덕으로 미화되기 쉬운 것이 자서전 집필의 위험스런 함정일진대, 하물며 그런 과거에서조차 구애됨이 없이 자유롭게 꾸며낸 인간사라면 그것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언제나 위대한 정치가요 언제나 존경받는 기업가요 신념 깊은 장군, 교육자, 천재적인 예술가요 변호사요 의사요 종교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이청준. 소설「자서전들 쓰십시다」(「문학과 지성」24호: 1976년 여름호)

이청준(1939-2008)은 연작소설「언어사회학서설」을 비롯한 많은 장단편 소설과 산문을 통해 웅숭깊은 시대적 통찰력을 작품에 새겼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현대화 속에 배금주의가 물들기 시작한 1970년대의 대한민국- 대표적인 지식인 작가로서 천박한 자본주의가 인간성을 얼마나 상실시키며, 위선과 허구가 난무하는 사회로 변질시키는지 그에 대한 ’탐구와 대립‘을 폭로한 것이다. 단편「자서전들 쓰십시다」는 작가의 그런 시각이 오롯이 드러난 문제작들 중 하나다.

30살의 윤지욱은 인기 코미디언 피문오씨의 자서전「흐르지 않는 눈물」을 집필하고 있다. 그러나 5년 가까운 자서전 대필을 통해 ’적당히 알아서‘에 동원된 말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에게 포기하겠다는 편지를 쓰고, 새로운 ’고객‘인 최상윤선생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충청도의 산간벽지 10만 평을 황무지로 일군 그에게서도 ’회의가 없는 미완성의 신념‘만 보았을 뿐이다. 호구지책의 대필작가이지만 그동안 수많은 ’작품‘의 오류를 통해 자서전의 진리를 되찾은 것이다.

자서전이란 원래가 주장이기보다는 고백이요 헌상이어야 했다. 나름대로의 뜻을 지니고 살아오면서 이룩해 온 것들을 이제는 이미 그것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삶의 결과로서 만인의 것으로 그 만인에게 바쳐지고, 그리하여 그 자신은 오히려 그 개인의 유한한 생애에서 해방되어 만인에 의한 만인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 자서전은 아직도 개인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자기주장일 수는 없었다. 자서전 속의 신념이라는 것이 그 자서전으로 하여 만인 속에서 자기의 뜻을 펴 실현하고 완성해내려는 주장이어서는 안 되었다. - 이청준. 소설「자서전들 쓰십시다」(「문학과 지성」24호: 1976년 여름호)

이런 확신이 담긴 편지를 받은 피문오는 동료와 지욱을 찾아와 이렇게 노골적으로 조롱한다. “고장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시다아 – 채권 삽니다아.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 사실 대필작가는 유명 코미디언에게 “교활하고 부황한 소리를 주워대며 일거리를 얻었다” 애당초 ’날것과 헛것‘을 뒤섞자는 제안은 작가가 먼저 했던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윤지욱이 환청 속에 이런 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난다. “자서전들 쓰십시다아, 자서전이요, 자서전, 자서전들 써요......” 위선과 가식을 벗어버리고 저마다 진정한 자서전을 각자 쓰자는 외침이다.

미셸 푸코(1926-1984)는 기독교의 고해성사에서 비롯된 ’자기 서사narrative of self 쓰기‘는 근대적인 성찰의 가장 핵심적인 형식이라고 단언했다. 사실 사람들 저마다의 삶은 이야기이고, 그것의 연속성이 유지될 때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다. 내러티브로서 화자는 자신의 일상을 선정하고, 정리하고 강조해 특정한 ’작품‘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이청준이 말하는 ’말과 글‘의 참된 본령이다.

몸과 마음 부리며 살아내면서 우리는 때때로 ’시계나 라디오‘처럼 고장이 날 수도 있다. ’우산‘이나 ’빈 병‘ 같이 잊혀지고 버려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탈은 결코 그런 물건들처럼 타인이 고치거나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옹색하고 던적스럽다 하더라도 스스로 위무하고 치유할 일이다. 바로 자기성찰의 글쓰기는 자신의 ’말과 글‘을 회복하므로써 새로운 길 찾기의 모색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특히 내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잃었을 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 성격이 어땠는지 등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들이 나에 대한 지식을 온전하고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썼다. 이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했다면, 나는 남의 말을 빌려다가 내 품성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내 모습을 가식적으로 훌륭하게 그리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내가 단순하고,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이 보였으면 좋겠다. 책을 통해 내가 묘사한 나 자신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녕. 1580년 3월 초하루. 몽테뉴

크세주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마음과 몸이 굳어 자신의 삶조차 무덤덤해지는 이들을 위한 경구가 아닐 수 없다. 로마 루쿠레티우스의 시구 “더 오래 살아도 새롭게 얻을 낙은 없다”를 천장에 써놓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지내던 몽테뉴- 그는 이 명제를 화두로 ’남아 있는 삶이나마“ 치열하자며 20년 동안『에세』를 쓰면서 버텼고, 구원의 길을 열어나갔다. 훗날 그는 ‘내가 나를 쓴 최초의 철학자’기 되었다. 이런 선상에서 미셸 에켐 드 몽테뉴를 ‘최초의 자서전 작가’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한가위 연휴를 끝내고 돌아온 일상- 고향 찾아 피붙이들과 정 나누고, 땅 기운 듬뿍 품었을 터 이제 다시 자신의 ‘말과 사실’로 이야기를 써나가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그 누구, 신에게마저도 의뢰할 수 없는 온전한 자서전의 작가임이 분명할 터. 부디 그 빈 페이지를 밝혀라, 아름답고 외경스런 서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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