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사실 매 시대마다 행복한 기억보다는 불행과 고통의 흔적을 더 많이 남긴다. 주로 불행한 일들이 역사에 남는 것이다. 한 가지 잘못된 생각이 우리에게, 인간에게 부여된 기쁨과 평화의 총합산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요한 호이징가(1872-1945)《중세의 가을》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하늘이 점차 맑아진다는 청명의 4월 첫 주말 어떻게들 보내셨나요? 저는 구순의 친부를 모시고 대청댐으로 나들이 갔습니다. 회갑의 외아들은 충북 영동으로 귀향한 지 5년인데, 그곳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이태 전에 아내를 먼저 보내드리고 홀로 대전에 계십니다. 자주 전화를 드리고, 때때로 찾아뵙는데 1년에 서너 차례 ‘부자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때마침 아들부부도 합석해 그러니까 4대가 호반이 한눈에 들어오는 현암정 전망대에서 만난 것입니다.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너와 나의 삶... 그 사이에

벚꽃의 삶이 있다 - 마쓰오 바쇼(1644-1694)의 하이쿠

“참 잘 피었구나! 좋다...” 부친은 감탄사를 연발하시면서 증손자를 안고 사진도 찍으시고, 손을 잡고 산보를 하셨습니다. 30년을 한 세대로 본다는데 저희 집은 1929년과 1959년, 1989년 정확하게 그 30년 터울입니다. 그런데 증손과 손자, 아들이 되는 ‘이안’은 2년 빠르게 2017년 4월 19일 태어났습니다. 연웅부부는 태명을 ‘축복이’라고 지었지만 저는 ‘혁명이’로 불렀죠. 1960년 4월 19일 이 땅에 역사적 학생혁명이 일어난 날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 스러지던 그날도 벚꽃 만발해 흰 꽃잎들이 흩날렸을 것입니다.

벚꽃축제가 열리는 댐 아래 광장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저 광장에서 여동생과 함께 우리가족 고기 구어 먹던 생각나는가? 그러자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대전에서 프로듀서로 방송생활에 바빴지만 취학 전의 남매를 데리고 주말에 자주 그곳으로 소풍갔었습니다. 레미니상스reminiscence- 그렇습니다. 모든 탐구는 경험으로부터 잃어버린 추억을 끄집어내는 행위입니다. 이를테면 만년필을 찾는다면 기억을 더듬거나 직접 찾는 ‘선험과 경험’적 방법을 쓰게 됩니다.

칸트에게 공간과 시간은 인간에게 주어지는 두 가지 선험적 형태였습니다. 다석 류영모선생은 인간은 모두 ‘이二’인데 ‘있거나 없기’를 한 몸에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석명입니다. 바로 노자《도덕경》의 유생어무有生於無 그 경구의 발현인 것이죠. 우리 모두는 없는 곳에서 와, 있는 존재로 머물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이들이 삼재나 삼간의 하나로 살아가죠. 하늘과 땅, 사람이 삼재이고, 시간과 공간에 인간을 합해 삼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 벚나무나 나비의 한살이도 이어지고요.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1908~?) ‘바다와 나비’

봄철 ‘나비’하면 일본 하이쿠의 대가 바쇼와 함께 김기림의 이 시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작년 말에 그가 유학했던 도호쿠대학 소재의 센다이에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제막식에서 오야기 유코 교수는 “1939년에 발표된 ‘바다와 나비’는 한 시대를 살아간 인간의 역사적 자각과 통찰, 예감으로 터득한 생존의 신념이 담겨 있다.”고 극찬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80년 전에 씌여진 시인데 참 현묘하고 진묘한 절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 한평생을 고해라고 부르거늘 산다는 것은 얼마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죠. 몸과 마음 어느 편이든 기쁘거나 슬프게 내어주며 이어지는 일생- 울고불고, 환호작약 하더라도 시간이, 나달은 가고야 또 오고야 마는 것인데 인도의 고대경전《우파니샤드》에 이런 경구가 보입니다.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이 강들이 바다에 이르러 잠긴다. 그것들의 이름과 형태는 사라져 버린다!”

가족과 직장이나 사회적 활동 속에서 때때로 새로운 이름을 얻거나 잃으면서 살아갑니다. 아버지가 낳은 아들이 다시 아빠 되고, 어머니가 낳은 딸이 다시 엄마 되는 엄정한 순환의 한 고리로 말입니다. 아마도 바다는 영원히 꽃을 피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모르는 수많은 나비들이 날개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제인가 환한 꽃 피워낼 것입니다. 금강은 무주의 남대천으로, 금산에서는 적벽강으로, 대청호에 갇혔다가, 부여의 백마강으로 그 이름이 바뀌지만 끝내 서해와 하나가 됩니다. 단절과 구획의 개인사와 가족사는 그렇게 모여들어 회두리에 하나의 역사가 됩니다.

20세기 그 100년의 ‘한 완성’이라는 T. S. 엘리엇(1888-1965) <황무지>의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김기림의 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황무지는 총 5부의 장시인데 인류사를 함축하면서 ‘증오의 세기’인 20세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세계대전을 비롯한 숱한 내전으로 사람들은 죽어갔고, 그 죽음은 우리에게 역사로 남겨졌는데 그에 대한 헌시인 것입니다.

우리 한반도 ‘4월의 기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1948년 제주 4.3사건을 비롯해 1960년의 4.19, 여기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사건이 보태어지고... 우리가 기억하고 또 회상하는 것은 ‘오히려 따뜻한’ 겨울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는 레미니상스 때문입니다. 가장 잔인한 이 4월에 남겨진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저 ‘용서하되 잊지 말라!’는 아포리즘의 실현인 것입니다.

제가 사숙하는 고 이윤기(1947~2010) 작가는 ‘사월과의 직면’이라는 수필에서 이렇게 규정했습니다. 고향 생가에서 선산 산밭까지가 내 인생이겠다- 대대로의 조상들 묻힌 선산과 첫 울음 터트린 생가는 한걸음인데 그래서 ‘고향은 나의 작은 저승’이라 노래한다고 하셨지요.

조용히 호이징가의 정언을 되뇌어봅니다. “우리에게, 인간에게 부여된 기쁨과 평화의 총합산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가도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 ”한 가지 잘못된 생각“입니다. 벚나무와 백목련 그 꽃잎들 분분한 낙화에서 뼈아픈 역사의 어제를 곱씹어본다면 우리들의 내일은 달라질 것입니다, 분명히. 부디 모두, 두루 평화로운 봄날 이어지길 비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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