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면 나는 술을 많이 마신다. 집이나 술청이 아닌 백마산 중턱에서 마신다. 조부모님과 두 백부님 부부, 모친께서 영면하시는 선산- 사실 이런 일탈은 5년 전 귀향하고부터 연례화되었다. 그리고 이태 전부터 눈이 적게 내린다는 날까지 연장되었다. “네 엄마가 돌아가셨다...” 89세의 처,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하고 알아보던 중에 11월 21일 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거주지인 충북 영동에서 대전까지 택시로 나가면서 내내 ‘벙어리 장갑’의 회억에 빠졌다, 나는.

하느님, 저에게 /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한 마음과 /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 바꿀 수 있는 용기와 / 언제나 그 차이를 / 분별할 수 있는 / 지혜를 주소서. - 커트 보니것 장편소설『제5도살장』9장

이 모든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이렇게 시작하는 보니것(1922-2007)의 장편소설은 부제가 좀 길다. “제5도살장- 혹은 / 소년 십자군 / 죽음과 억지로 춘 춤: 오래전 전투력을 상실한 / 미국 보병 정찰대원으로서, 전쟁포로로서, /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부르는 /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을 목격했고, / 또 살아남아 그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 이것은 비행접시를 보낸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이야기들을 / 약간 전신문체적이고 /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다. 평화를.”

커트 보니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1944년 12월 벌지전투에서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그와 함께 ‘3총사’는 기차로 이송돼, 드레스덴의 도살장을 개조한 ‘슐라흐토프-핀프’에 수용되었다. 이듬해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영국과 미국 폭격기의 공격으로 드레스덴은 ‘달의 표면’처럼 되었고, 13만 5천여 명이 죽었다. 작가는 그곳의 지하 고기저장소로 피신한 덕에 살아남았다. 보니것의 참전은 25년의 숙성기를 거쳐 1969년 소설로 체현돼 출간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969년에. 아버지께서는 지금은 세종시로 상전벽해한 연기군 금남면의 우체국장이셨다. 관사와 4km 남짓 떨어진 금남초등학교- 면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국도변의 점포를 지나, 장터와 우시장을 스치고, 금강을 바라보며 걷는 통학로는 언제나 느리고 더딘 걸음이었다. 그해 초가을 차부 아래 옷가게에 벙어리장갑 한 켤레가 내걸렸었다. 나비와 매미, 잠자리의 날개 같은 오방색의 아름다운 무늬는 손길과 눈길을 사로잡았고, 갖고 싶다고 발설하고 말았다. 이미 빨간색 털실로 장갑을 뜨시던 엄마는 수시로 나의 손에 ‘가봉’을 하셨는데 말이다. 눈은 여전히 하늘의 눈일 뿐일 텐데 유년의 뜰에는 왜 그렇게 일찍, 많이도 내리는지... 마침내 어머니는 책상 서랍에 처박아두고 끼지 않았던 그 빨간색 대신에 다섯 색의 장갑을 사주셨다.

소리는 몸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몸이 아니면 소리를 빌려 올 수가 없다. 잠시 빌려오는 것이다. 빌려서 쓰고 곧 돌려주는 것이다. 소리는 곧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자리는 적막이다. 그 짧은 동안 흔들리고 굽이치는 것이다. 소리는 거스를 수가 없다. - 사람의 말소리는 어떠합니까? - 말소리나 노래도 그러할 것이다. 몸속의 숨이 세상의 바람과 부딪히고 비벼져서 떨리는 동안만의 소리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같은 말소리나 같은 노래는 없는 것이다. - 김훈 장편소설『현絃의 노래』「기러기떼」

이 소설(2004년 작)과 짝패인『칼의 노래』는 2001년에 발표되었는데 그는 「자전적 에세이」에서 이렇게 토로한다. “이 희망이 없는 세계의 참상이 아무런 수사 없이 알몸뚱이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이순신이라는, 거대하고 암울한 내면을 가진 사내가 그 희망 없는 세상을 희망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의 문장은 세상을 가차 없이 내려치는 단문이었다.” 1966년 대학에 입학하던 해『난중일기』를 읽은 작가는 절망에 가까운 경악에 벌벌 떨기도, 울기도 했는데 30년이 훨씬 지나서야 헌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우륵은 현으로, 충무공은 칼로 자신의 노래를 불렀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그렇다. 사람을 비롯한 만물은 똑같은 시간은 있으나, 똑같은 위는 없는 법이다. 같은 공간이 없기 때문에 삼라만상은 각각의 존재와 입장을 갖게 된다. 결국 ’칼과 현‘은 그 위의 증명이고, 몸과 마음 부리며 사는 노래가 된다. 김훈과 보니것은 소설의 주인공 그 ’위‘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 30여 년을 기다렸던 것이고 회두리에 헌정했다.

깜깜한 방이 한번 닫혀 버리면, / 천년토록 다시는 아침이 되지 않으리. / 천년토록 다시 아침이 되지 않으리니. / 현달한 사람들도 어쩔 수가 없다. / 지금까지 나를 전송해 주던 사람들은, / 각자 가기 집으로 돌아간다. / 친척들은 혹 슬픔이 남아 있지만, / 다른 사람들은 역시나 벌써 노래를 부른다. / 죽었는데 무엇을 말하겠는가, / 몸을 의탁하여 산언덕과 하나가 되었으니. - 도연명「만가시挽歌詩」제3수 부분

오류선생은 63세 되던 427년 9월에「만가시」3수를 지었고, 그해 11월에 작고했다. 천문과 인문, 시문에 현달한 그로서도 피할 수 없었던 죽음- 대자연의 변화에 대한 순응과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부질없음에의 초월, 생사의 문제에 대한 달관의 경지를 함축한 시는 후대 자만시自輓詩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녁이여! 자만시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아시는가?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작시가 곧 자만시이다. 묘지명은 무덤 속 두 개의 돌에 새겨지는데 지는 고인의 성씨와 고향, 벼슬 따위를, 명은 행적을 기리는 글이다. 살아생전 그 지명을 직접 쓰는 일이 바로 자찬이다. 이는 영면에 임박해 남기는 유서나 유언, 회고록이나 자서전과도 차원이 다르다.

죽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 내가 이것을 안 지가 오래되었다. 옛사람이 이른바 ‘존오순存吾順하고 몰오령沒吾寜: 살았을 때는 이법을 따르고, 죽을 때에는 편안히 가는 것)’이라 한 것이 참으로 먼저 깨달은 말씀이로다. - 송준길『동춘당同春堂 연보年譜』67세시歲時 기사記事

동춘당(1606-1672)은 송시열(1607-1689)과 함께 은진 송씨 문종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 유가의 양송으로 불리었다. 생동지 사동전: 살아서는 뜻을 함께 하고, 죽어서는 후세에 전해짐을 함께 한다- 그러나 우암이 강직한 성정이었다면 동춘당은 외유내강형이었다. 호 동춘 그대로 늘 봄과 같은 따뜻한 기품으로 아름다운 생을 살아내고자 애썼지만 가정사는 매우 불운하였다. 1988년 10월 23일 결혼한 우리 부부는 동춘당공원과 면한 대전 송촌동 선비마을에 10년간 살았었다.

관혼상제- 한뉘의 통과제의 중에서 관례와 혼례는 선대의 몫이요, 장례와 제사는 후손이 맡는 게 사람으로 태어난 도리의 본령이다. 지극한 정에는 글文章이 없고, 지극한 슬픔에는 말言辭가 없는 법이라 했던가. 세상 가장 소중한 살붙이와 함께 하는 기쁨과 슬픔에 무엇을 더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지만 그 노고가 바뀐다면 어떠하겠는가?

2019년 올해 나는 환갑을 맞았고, 내자가 살아 있으면 55세가 된다. 2009년 11월 초 우리는 계룡산으로 소풍을 갔었다. 단풍나무와 떡갈나무, 오리나무... 낙엽 수북한 산길을 걸으며 그녀는 내게 말했다. ”여보. 두 아이 낳고 당신과 산 21년 참 행복했어요. 이제 다 용서해 줄게요...“ 집사람은 그해 11월 19일 목요일 저녁 6시 21분에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고 8년 후에 시어머니와 상봉했다.

충북 영동의 국도 4호선과 경부철길 건너 백마산에 오르면 두 여인의 ‘노래’가 들린다. 그 소리가 ‘놓아 달라’는 것이지만 나는 이승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술 취해 기억 저편이 흐릿해져도 점선으로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보니것이 나의 정수리를 매만지며 위무한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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