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김래호 작가 / 뉴스티앤티

사진의 진짜 내용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활동에서 생겨나기 때문인데, 형식의 활동이 아니라 시간의 활동이다. 사진은 회화가 아니라 음악에 더 가깝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앞에서 사진은 인간이 실행하는 선택에 대한 증거라고 말했다. 이때 선택이란, X와 Y 중에 무엇을 찍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 아니라, X순간에 찍을 것인가 Y순간에 찍을 것인가 하는 선택이다. - 존 버거《사진의 이해》

1년 중에 사진을 가장 많이 찍고, 찍히는 달은 어느 달일까? 아마도 가정의 달 5월이 아닌가 한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여러 기념일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법. 선물을 장만하고, 식사 자리를 갖거나, 여행을 통해 나름의 의미를 새기는 것이다. 그런 시간이면 자연스럽게 엄지와 검지의 손 하트를 날리면서, 파이팅을 외치면서, 서로 한 자리에 있었음을 사진으로 남긴다. 여기에 오가는 길에 만발한 장미와 모란, 이팝나무 따위의 초여름 꽃들을 핸드폰으로 촬영하기도 한다. 가히 호모 캐머리스트camerist 시대다.

짜장, 1839년 사진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무엇이 사진의 역할을 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드로잉과 유화, 판화 등 회화였을 텐데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기억’이다. 두뇌 속에 저장된 어떤 인상이나 경험을 되살리는 능력- 현장성과 동시에 기억에 의해 화폭이나 지면으로 재연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술 장르로서의 ‘회화가 아니라 음악에 더 가깝다’는 주장은 왜일까? 존 버거(1926-2017)는 ‘회화는 세계를 해석하고 그 자신만의 언어로 번역하는 반면에 사진은 자체의 언어를 지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사진이 다루는 ‘언어’는 찍힌 사건들의 언어이고, 사진이 언급하는 것은 모두 사진 외부의 ‘연속성’에서만 의미가 전달된다는 뜻이다.

문학이나 음악, 무용이 시간예술이고, 공간예술이 회화와 조각, 건축이고 보면 존 버거의 분석에 수긍이 간다. 시간과 공간, 인간을 삼간이라 부르는데 하늘과 땅, 사람을 지칭하는 삼재와 같은 뜻이다. 이렇게 보면 ‘사진’이야말로 가장 유의미한 인간적인 활동이다. 사진 속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자신은 부재하지만 그것을 통해 긍정과 부정의 감정을 일으키면서 동조한다.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공감과 이해, 추억이 사진을 통해 고스란히 재연되는 것이다.

한 장의 사진을 사랑할 때, 또는 그 사진이 나를 어지럽힐 때, 나는 그것 때문에 머뭇거린다. 그 사진 앞에 머물러 있는 동안 내내, 나는 무엇을 하는가. 마치 그것이 보여주는 사물 혹은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것을 보고 탐색한다. 온실 뒷구석에 망연히 서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흐릿하고 창백하다. 나는 불현 듯 소리쳤다. “어머니다! 참으로 어머니다! 마침내, 나의 어머니다!” -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41

탁월한 사진이론서인《카메라 루시다》에는 저자의 어머니가 찍힌 ‘온실 사진’이 게재되어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물론 프랑스인들조차 그저 한 어린애의 사진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1915-1980)에게는 실로 위대한 어머니의 본질로 함께한 시간, 언어, 사랑, 그리고 죽음의 ‘실존 증명서’가 된다. 그는 “모든 사진은 현존에 관한 증명서”라고 규정하고, ‘과거나 역사’의 저항감을 대폭 축소시키는 사진의 출현은 인류학적으로 새롭고 경이로운 대상이라고 논구했다.

사진을 ‘약호 없는 메시지‘로 정의한 바르트는 ’스투디움 / 푼크툼‘으로 구분하고 논의를 확장시켰다. 전자는 사진의 주체가 보여주는 흥미, 즉 정보이므로 약호화.개념화가 된다. 바로 사진을 보는 구경꾼의 의식이다.

반면에 푼크툼은 사진에서 화살처럼 날아온 무엇이 감상자의 가슴을 찌르며 상처를 입혀 의식을 깨우는 것이다. 그런 파장은 지극히 개인적인 울림이므로 개념화 될 수 없다. 묶어 보면 장례식장의 영정사진은 문상객에게는 그저 고인이 되셨다는 ’기호‘이지만 그 식구와 일가친척들에게는 ’진혼곡‘ 그런 음악으로 내내 연주되는 것이다.

사진은 말이 없어야 한다. 그것은 ‘사려깊음’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의 문제이다. 절대적인 주관성은 하나의 상태, 즉 침묵의 노력 속에서만 얻어진다. 사진은 흔해빠진 수다스러움으로부터 끌어 낼 때에 나를 감동시킨다. ‘테크닉’ ‘현실감’ ‘르포르타쥬’ ‘예술’ 등등이 바로 수다스러움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 눈을 감을 것, 하찮은 세부로 하여금, 홀로 푼크툼을 발견케 하는 감정적 의식을 향해 거슬러 올라가도록 내버려 둘 것. - 롤랑 바르트《카메라 루시다》22

음악의 문제- 그렇다. 악보는 음악을 표상하는데 그것은 악기에 의해 연주되거나, 노래로 부를 때 음악적 선율로 드러난다. 이런 뜻에서 말러는 ‘정작 음악에서 중요한 것은 악보에 없다’고 단언했다. 숙련된 연주자나 지휘자는 악보를 읽어내지만 일반인들은 연주행위를 통해 감상할 뿐이다. 그처럼 대다수의 사진은 스투디움으로 스치지만 가족사진은 푼크툼 자체로 애절함과 그리움을 발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6, 70년대 사진관은 일종의 성소였다. 상급학교의 학적부나 주민등록 부착용 사진을 찍거나, 가족들의 소중한 기념일을 간직하기 위해, 사원증과 각종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그러니까 통과의례로 들른 성스런 곳이었던 것이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옷매무새를 고치고, 촬영용 의자에서 ‘포즈’를 취한다. 사진기사는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웃으라고 몇 번이고 말하지만 긴장감은 최고조였다.

당시에는 사진기사가 출장 나가는 일도 많았다. 회갑이나 전통혼례 잔치를 찍기 위해서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교 봄가을 소풍에는 읍내 사진관 아저씨가 따라 오셔서 반별로 찍었던 기억도 있다. 물론 졸업앨범 사진촬영은 대학까지도 이어졌던 것이고... 그러다가 사진기가 보급되고, 천연색 사진이 유행하면서 사진문화도 거듭 ‘진화’했는데 이제 휴대폰이 사진기를 대체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웠고, 그 어떤 것도 아프지 않았다- 커트 보니것(1922-2007)의 장편소설《제5도살장》에 나오는 묘비명인데 앨범을 넘길 때마다 그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절 그리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오롯한 사진들- 가정의 달 5월이 다 가기 전에, 아니 어느 달이라도 피붙이나 인연 맺은 사람들과 자주 눈길과 손길, 발길을 모아야 하리라! 하면 꿈길 같은 한뉘 마칠 때 말할 수 있을 터. 이승의 나날이 죄다 아름다웠고, 결코 그 무엇도 아프지 않은 한살이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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