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 재임 38년 신하들의 당파 싸움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영조는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아들 사도세자를 폐위시킨 후 뒤주에 가둬 죽게 하였다. 그리고 아들의 무덤을 ‘수은묘’라 는 평민들에게나 붙이는 '묘' 라는 이름을 붙여 양주 배봉산 아래에 급하게 장례를 치뤘다.
11살에 아비의 억울한 죽음을 지켜본 정조는 왕에 즉위하자마자 "나의 아버지는 사도세자가 아니다." 라고 선포한후, 아버지의 이름 '사도'라는 명칭을 폐하고 아버지를 '장헌'으로 추존한 후 명당을 찾아 아버지의 무덤을 지금의 수원 화성으로 이장한 후 ‘현륭원’이라 명했다.
임금의 친족으로 왕이 된 사람의 후궁이면서 왕세자의 생모이거나 재위에 오르지 못한 왕세자와 빈의 무덤에 붙이는 ‘원’이름을 붙여 왕족임을 나타냈던 것이다.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환갑잔치를 위해 8일간에 걸쳐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간 정조의 행차를 기록한 ‘화성능행도’는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지극한 효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후 1899년 고종은 정조의 아버지를 ‘장조’ 즉, ‘왕’으로 추존하였고 사도세자의 무덤은 ‘현륭원’에서 지금의 ‘융릉’이 되었다. 비로소 후손 고종에 의해 왕의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무덤은, 왕은 ‘릉’, 왕족은 ‘원’, 그 외 기타 사람들의 무덤에는 죽은자의 이름과 함께 ‘000묘’라는 호칭을 붙였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이 세 가지 이름 ‘묘, 원, 릉’이라는 호칭을 전부 갖게 되었다.
이 세 가지 무덤의 이름을 모두 가진 사도세자 능인 ‘융릉’에는 한 나라의 군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아비의 넋을 달래는 아들의 지극한 효심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2025년 2월 4일. 페이스북에 박정현 국회의원이 어머님을 하나님 품으로 보낸 후 가슴 아픈 사연을 구구절절이 올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해주고 있어 이곳에 옮겨 보았다.

☛ 어머님께서 가신지 이레째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줌의 재로 마무리 되니 허망하고 쓸쓸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편찮으셨던 어머님께서 육신의 고단함을 벗고 자연의 깊고 넉넉한 품으로
가셨다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아버님께서 미리 가셔서 자리 잡고 계신 청도 선영으로 가는 길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춥지 않았고 어머님 모실 그 곳은 아늑하고 포근했습니다. 먼저 가신 아버님과 남동생이 어머님을 많이 기다렸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사년에 태어나셔서 을사년에 돌아가신 어머님이 많이 보고 싶지만 많은 분들이 어머님 가시는 길에 따뜻한 위로의 마음을 전해 주셔서 잘 견디고 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그 마음 잊지 않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

어머님을 영원히 떠나보내는 자식의 애끊는 마음.
그래서 여기. 필자의 졸필로 그 서러워하는 딸의 애타는 심정을 표현 할 수 없어 남진 가수의 ‘어머니’라는 노래로 마감하려고 한다.
어머니 / 가수 남진
어머님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셨어요
백날을 하루같이 이 못난 자식 위해
손발이 금이 가고 잔주름이 굵어지신 어머님
몸만은 떠나있어도 어머님을 잊으오리까
오래 오래 사세요. 편히 한번 모시리라
어머님 어젯 밤 꿈엔 너무나 늙으셨어요
그정성 눈물 속에 세월이 흘렀건만
웃음을 모르시고 검은 머리 희어지신 어머님
몸만은 떠나있어도 잊으리까 잊으오리까
오래 오래 사세요 편히 한번 모시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