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칠백의총사적 제105호(1963. 1. 21 지정),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50번지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700명의 병사들을 위한 무덤과 사당이다.조헌(1544∼1592)은 의병장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호조좌랑, 예조좌랑, 감찰을 거쳐 보은현감으로 나갔으나, 여러 번 재등용되었는데 사직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1,7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와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이어 금산에서 왜군을 막기 위해 남은 군사 700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시호는
영동 한천정사충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1999. 9. 15 지정),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원촌동 1길 48우암 송시열(1607∼1689) 이 학문을 연구하며 지내던 집이다.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조선의 대유학자로,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조선 인조 대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졔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었다.후에 우암의 제사를 모시는 한천서원을 세웠었는데, 고종 5년(1868)에 서원을 철거하였고 후에 후학들이
김익희의묘대전시 기념물 제5호 (1989. 3. 18 지정), 대전 유성구 대덕대로 507-150(가정동)김익희(金益熙:1610~1654) 선생의 자는 중문(仲文)이요 호는 창주(滄州)이다.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손자로서 인조 11년(163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벼슬을 지내는 동안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서 독전어사로 활약하였다.효종 때는 승지, 대제학 등을 지냈고, 벼슬이 찬서에 이르렀다.대전 대덕연구단지내 국립중앙과학관 뒤쪽 야산에 위치한 묘역은 선생과 부인의 묘를 비롯하여 그 일가의 묘역으로 조성되었다.묘의 왼쪽
유회당(부)기궁재대전시 유형문화재 제6호 (1989. 3. 18 지정), 대전 중구 운남로85번길 32-20 (무수동)유회당과 기궁재는 권이진(1668∼1734) 선생의 호를 따서 지은 건물과 그에 소속된 재실로 보문산 남쪽 기슭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늘 품고 싶다는 뜻을 지닌 ‘유회(有懷)’는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유회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건물로 활수담이라는 작은 연못 뒤쪽에 있다. 앞면과 양쪽 면에 난
유회당판각대전시 유형문화재 제20호(1991. 7. 10 지정), 대전시 중구이 책판은 유회당 권이진(1668∼1734) 선생의 문집을 새기기 위해 만든 판목이다.권이진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외손자이다. 권이진은 1694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인해 순탄하지 못했다.172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궁중에서 민간의 논밭을 사들이지 말 것과 공물을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거두지 말 것 등을 건의할 만큼 성격이 곧고 강직하였다. 이 문집에는 시와 소(疏:상소글) 등이 실려있으며, 유회당 선생이 관직에 있던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제802호(1984. 11. 30 지정),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마곡사마곡사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설과 승라의 승려 무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신라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가 대웅전·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고쳐 지었다고 한다.이 건물은 마곡사의 중심 법당으로 해탈문·천왕문과 일직선으로
구성동산성대전시 기념물 제6호(1989. 3. 18 지정), 대전 유성구 구성동 산4-3번지대전광역시 유성구 구성동에 있는 성두산 정상의 지세를 이용하여 산의 안팎을 적절히 깎아 급경사의 성벽을 이룬 산성으로, '거북성'이라 부르기도 한다.현재 거의 대부분이 붕괴되어 성의 윤곽석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성안에는 너비 8~10m의 도랑이 둘러져 있는데, 이것은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이 산성은 성두산 정상부에 축조한 북성과 남으로 뻗은 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남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북쪽 성벽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제 799호(1984. 11. 30 지정), 충남 공주시 사곡면 마곡사로 966, 마곡사(운암리)마곡사는 통일신라시대 때 창건되었으며, 구한말에는 독립운동가 김구와도 인연이 깊었던 사찰이다.김구는 명성황후 사해에 가담했던 일본인 장교를 죽인 후 인천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로 지냈는데, 지금도 대광보전 앞쪽에는 김구가 심었다는 항나무가 자라고 있다.절마당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5층의 타빈(塔身)을 올린 후
옥천 송갑조 유기비충북도 문화재자료 제55호(2006. 4. 7 지정) / 충북 옥천군이 비는 송갑조(1574-1628)가 살던 집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4년에 후손들이 세웠다.송갑조는 조선 인조 때의 문신으로서 본관은 은진이며 자는 원유(元裕) 호는 수옹(睡翁)이고 우암 송시열의 아버지이다.그는 1617년(광해군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있을 때 인목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유생의 명단에서 삭제되어 벼슬길이 막혔다.그 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때 강릉 참봉을 지냈으며 다음 해 이괄의 난 때 공주(公州)로
옥천 송시열 유허비충북도 기념물 제45호(1979, 09. 29 지정), 충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우암 송시열(1607~1689)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비는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대전시 기념물 제26호(1991. 07. 10 지정), 대전 중구 어남동 233[김윤경/ 문화관광 해설사]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산리(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9세에 자
송시열 유적 '암서재'사적 제417호 (1999. 12. 29 지정),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암서재는 화양구곡(華陽九曲) 제4곡 금사담(金沙潭) 물가의 큰 반석가에 있는 서재로,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계에 은퇴한 후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화양구곡은 청계리에서 약 8km 지점에 있는 화양리 박대천(博大川)의 지류인 화양천을 따라 펼쳐진 명승지로 화양동도립공원 내에 있다.이 계곡의 주위 바위 사이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은 물이 감돌며 층암절벽이 즐비하여 경치가 매우 좋다
상당산성사적 제212호 ( 지정),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사적 제212호, 지정면적 180,826㎡ 원래 그 자리에 백제시대부터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상당산성은 1716년(숙종 42) 석성으로 개축되었다.백제시대에 청주목(淸州牧)이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렸고, 숙종 때 축성기록에 '상당기지 개석축(上黨基地 改石築)'이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한다.8부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를 포함하고 있는 동서의 등성이를 타고 사행(蛇行)하는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4.2㎞의 유구가 잘 남아
송시열 유적 '만동묘'사적 제417호 (1999. 12. 29 지정),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만동은 물이 만 구비를 흘러 동해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존명의식을 표현한다.이 사당은 정묘호란·병자호란을 일으킨 청을 사상적으로 부정하기 위해 만들었다.숙종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민정중이 명 황제 의종의 어필인 '비례부동'의 글자를 얻어 송시열에게 주었는데,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리의 석벽에 새긴 뒤 원본은 환장암 옆에 운한각을 지어 보관했다.1689년 송시열이 사사되기 전 권상하에게 신종과 의종의 사당을 세
청주 신채호사당 및 묘소충북도 기념물 제90호(1993. 11. 5 지정),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길 249일제강점기시대 독립운동가·역사가·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사당 및 묘소이다.20세에 성균관박사가 되었으며,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며 불법적인 을사조약 체결을 단호히 배격하였고, 대한매일신보에 초빙되어 주필로서 국권회복,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하였다.28세 무렵에 이동녕·안창호 선생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10년 해외에 망명한 후 본격적으로 국사 연구에 힘써 '
김장생선생묘소일원충남도 기념물 제47호(1984. 7. 26 지정),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 7-4번지 외 5필조선 중기의 대학자였던 사계(沙溪) 김장생(1548~1631) 선생과 광산 김씨의 중흥을 이룬 허씨 부인, 김철산, 김겸광, 김공휘 등의 묘지이다.김장생은 송악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명나라 군대의 군량조달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였고 과거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벼슬은 맡지 않았으나 인조반정 이후로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의 중심 인물이 되어 영향력
계백장군유적전승지충남도 기념물 제74호 (1989. 12. 29 지정),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산4번지 외 27필성충(成忠), 흥수(興首)와 더불어 백제의 3충신으로 꼽히는 백제 말기의 명장 계백 장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다.계백 장군은 의자왕 20년(660)에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진격해오자, 5천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5만 대군에 맞서 싸웠다.전장에 나가기 전에는 가족들이 적의 노비가 되는 부끄러움을 면하기 위해 스스로 부인과 자식을 죽이고 떠났다고 한다.죽음을 각오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1993. 10. 18 지정),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외 5필지 임리 74번지 외 5필지돈암서원은 김장생(1548~1631)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건립한 서원이다.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며,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충남도 유형문화재 제50호 (1976. 01. 08 지정),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갑사 동쪽 계곡 약 100m 지점의 자연 동굴안에 있는데,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고 얼굴은 긴편이다.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을 약간 노출시키고, 무릎 아래까지 늘어져 있다.가슴 아래로는 반원형의 옷주름이 표현되었고, 왼쪽 어깨 부근에서는 한 가닥의 주름이 어깨너머로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손모양을 살펴보면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에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충북도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1송시열(1607~1689)의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호는 우암(尤庵) 또는 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신도비는 1779년(정조3)에 어제(御製)로 세웠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250cm로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의 보호각 안에 있다.묘소는 신도비각으로부터 위로 300m 지점의 산 중턱에 있는데, 본래 수원(水原)에 있었던 것을 1697년(숙종23)에 지금 위치로 옮겼다. [안갑수 선생님]대전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좀 더 우암 선생을 재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