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유적 탐방]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 대전 중구
[문화 유적 탐방]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 대전 중구
  • 박기봉 기자
  • 승인 2019.08.0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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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대전시 기념물 제26호(1991. 07. 10 지정), 대전 중구 어남동 233


[김윤경/ 문화관광 해설사]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 충청남도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산리(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 233)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김부식 삼국사기에 대해 보완하여 [조선상고사] 집필 이후 조선의 위인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최영장군전' 등 영웅전을 집필.

올해가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인데 선생께서도 임시정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함.
하지만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에 반대하면서 임시정부에서 탈퇴

 

신채호는 한말 일제시대에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으며 26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그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을 써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였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윤경/ 문화관광 해설사]

일본인 암살, 건물 폭파 등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의열단을 조직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에 반대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 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장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한 문서로 손꼽힌다.

 

[김윤경/ 문화관광 해설사]

발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그해 5월 8일 유병택(柳炳澤, 일설 柳孟源)이라는 가명으로 타이완 지롱(基隆)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대기 중이던 일본경찰에게 체포된다.

 

선생은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1992년 여름 선생의 생가를 발굴 조사하고,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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