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저에게는 새벽마다 좋은 글을 보내주시는 지인이 한 분 계십니다. 저는 이분을 존경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이유는 그동안 그분의 국가관이나 정체성에도 이유는 있겠지만, 그동안 지인께서 서울의 모 신문사 사장으로 계시면서 써오신 '정론직필'때문입니다. 

저보다 나이는 젊지만 건강 때문에 어느 산 속에서 요양을 하고 계신 분으로 오늘도 글을 보내주셨기에 제 자녀들이나 형제들과 공유하려고 글을 옮겨봅니다.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바보’라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기분 나쁘고, 자존심 상하고, 불쾌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는 평생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으며 바보 같은 삶이 오히려 성공한 삶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였지만 집 한 채 없이 평생 가난 한 사람들을 돕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겸손한 삶을 사셨던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 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입니다.

서울대, 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 한 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 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 대학 교수 겸 부속 병원 외과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 는 조건으로 부임 했고, 환자를 수술 할 때는 항상 기도하고 시작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 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 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 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 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 혜택을 해 주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의료보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고, 주님만을 섬기며 겸손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 받는 것을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가며 부상 당한 국군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나는 한 여인 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 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 들의 가슴을 에는 듯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 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하였습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주님과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내가 죽고 나거든 나의 비문에는 '주를 섬기면서 살다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처럼 바보처럼 사는 삶, 많은 사람이 장기려 박사님을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지인께서 보내주신 글 입니다.~
선생님 건강하셔서 나라를 지키고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돼 주십시오. 저도 이 새벽 선생님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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