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가구시대 고독사 많아....공영장례 모색해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시인의 노래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삶과 죽음이 있다.
바로 쪽방에서, 거리에서 평생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외로운 섬처럼 고독 속에 살다가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불려 지기(사망확인) 전에는 죽었음에도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노숙인이라는 낙인으로 힘겹운 삶을 지탱하다가 쪽방에서, 거리에서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미 생을 마감했음에도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넘어도 사망확인이 안 되면 죽지 않은 사람.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이 부패된 상태가 되어서야 죽은 사람이 된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얼마 전 기사를 보면 국민의 10명 중 8명이 안락사에 대한 입법화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윤영호 교수팀이 지난해 3월부터 4월까지 만 19세 이상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한 태도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 국민의 76.3%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 입법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찬성의 이유로 남은 삶의 무의미(30.8%)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좋은(존엄한) 죽음에 대한 권리(26%), 고통의 경감(20.6%) 순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넓은 의미로 웰다잉을 위한 체계와 전문성에 대한 법제화가 필요한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85.9%가 찬성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웰빙을 넘어 웰다잉을 고민하고 인간답게 죽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락사, 웰다잉을 논하기 이전에 그 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고독사에 대한 문제이다.
얼마 전에도 쪽방에서 외롭게 사시던 분이 사망한지 일주일 만에 그것도 연락이 되지 않아 벧엘의집 일꾼이 경찰을 대동해 집을 방문해서야 확인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죽었지만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알 수 없었기에 일주일 간 그는 산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존엄한 죽음, 생의 자기결정권 등 웰다잉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그 누구도 애도의 시간도 없이 죽었는 지 살았는 지 조차 모른 채 생을 마감하는 아이러니가 공존한다.
하여 벧엘의집에서는 쪽방생활인 등 독거인들의 주거공간에는 동작감지 센서를 설치하여 일정기간(2-3일 정도) 동작이 감지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요구를 꾸준히 제기하기도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독사와 함께 또 한 가지 문제, 즉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문제이다.
애도의 시간도 없이 그저 시신처리 수준으로 처리되는 무연고자 장례절차다.
이를 위해 지난해 동짓날 대전노숙인 선언을 통해 공영장례제도 입법화를 요구하기도 했다.
공영장례란, 장례의식 없이 시신이 처리되지 않도록 공공(公共)이 무연고 사망자 및 저소득시민에게 검소한 장례의식을 직접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이러한 장례의식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 고인이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유가족과 지인 등이 고인을 애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장례를 말한다.
웰빙을 넘어 웰다잉을 이야기하는 한쪽에서는 여전히 이미 생을 마감했음에도 그 누군가에 의해 이름이 불려지기 전까지는 죽지 못한 채 방치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죽었어도 돈이 없어 시신처리 정도로 장례가 치러지는 사람들.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웰다잉을 논하려면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시신처리로 끝나는 무연고사망자를 최소한 애도할 수 있는 공영장례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고독사로 시신이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다양한 대책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 뾰족한 해결책은 없지만 함께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제번하옵고, 그동안 벧엘이야기를 읽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분간 가던 길을 멈추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며 부족하지만 삶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한계를 느낍니다. 앞으로 어떻게 사람다움의 세상을 이야기해야 할지 숙고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제 글에 공감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