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우수雨水」(한지에 수묵캘리: 70✕45cm)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우수雨水」(한지에 수묵캘리: 70✕45cm)

2월 19일- 어제가 우수雨水였습니다. 한 철에 6개씩, 보름마다 갈마드는 24절기: 15✕24= 360 맞습니다. 대괴는 스스로 돌면서 밤낮을, 해를 크게 한 바퀴 선회해 1년을 만듭니다. 그 태양력에 입춘과 경칩 사이의 우수는 본격적인 새봄이 열리는 절후입니다. 이제 높은 산의 숫눈은 물론 얼었던 계곡과 강물도 풀려 낱말 그대로 ‘빗물’로 흘러내리는 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물기운 그 수기水氣의 순환이 바로 1년입니다. 봄비, 장맛비, 이슬과 서리, 눈... 그렇게 ‘물’은 순환하며 한 해를 빚어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계절과 날씨가 있으실 터. 하지만 자연적 변화에서 물이라는 본질을 염두에 둔다면 천문에 밝다는 소리를 들으실 것입니다. 시절을 안다 혹은 모른다 해도 불편함은 없지만 그래도 잘 살펴두면 한때 거기, 지금 여기의 자신의 위상을 좀 더 명확하게 자리매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벌써'라는 말이 /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 없을 것이다 // 새해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 벌써 2월 //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 드러내 밝힌다 //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 문득 털외투를 벗는 2월은 /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 보여주는 달 // '벌써'라는 말이 /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 아마 없을 것이다​. - 오세영(1942- ) 詩「2월」전문

순우리말 ‘벌써’는 한자로 “이미 이已”와 “예상보다 빠르게, 불쑥 돌突” 두 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일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가 앞의 의미라면, 뒤는 “창밖에는 벌써 봄기운이 완연하다!”처럼 쓰입니다. 어느 편이든 벌써는 ‘시간과 세월’을 나타내는 표현에 짜장 잘 어울리는 토박이말입니다. 오세영의 시「2월」에 보이는 ‘벌써’는 그런 등가적 진리를 아우르는 시어입니다.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 보여주는 달- 비어 있던 그 자리에 벙글기 시작한 매화 꽃망울. 그 자태는 혹한과 삭풍의 겨울을 이겨냈다는 환호성이겠지요. 그래서 유채,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봄꽃은 이파리보다 꽃을 앞세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2월도 다르지 않겠지요. 이제 겨울날 두껍고 무거운 외투 같던 고난과 역경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각오와 다짐의 시기가 바로 새봄입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우수雨水」(한지에 수묵캘리: 70✕45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우수雨水」(한지에 수묵캘리: 70✕45cm) 부분

남호南湖 정지상鄭知常은 ’고려 12시인‘의 반열에 꼽힐 정도로 문학사적 위상이 높습니다. 노장老壯의 도가에 정통했고 주역과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문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서경을 거점으로 일어난 ’묘청妙淸의 난亂(1135-1136)‘에 적극 가담해 개경파 김부식이 이끈 토벌군에게 참살된 비운의 정치가이기도 합니다. 그의 명작「송인送人」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절하게 그린 한시입니다.

이별, 고별, 석별, 작별, 별리, 몌별... 헤어진다는 것은 그 어떻게 불러도 왼편 가슴 속 심장이 서늘한 슬픔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섧고 시린 마음에 흘리는 눈물이 흘러 대동강을 적시니 그 장강도 마를 날이 없다는 과장도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그런데 배경이 분명 평양 대동강변의 연광정練光亭일텐데 ’남포南浦‘라는 지명을 굳이 썼을까요?

’남포‘는 기원전 4세기 중국 전국시대 시인 굴원屈原의 「구가九歌」에 처음 등장합니다. “그대의 손을 잡고 동으로 가서, 고운 임을 남포에서 떠나 보내네” 그 후 남포는 이별의 상징적 장소가 됩니다. 송군남포送君南浦- 다시 정지상의 시로 돌아가 봅니다. 겨우내 눈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강가에 비가 내리자 새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납니다. 그렇게 강물이 풀리니 배들이 다시 오가겠지요.

정월 시냇물은 아으어져 녹져 하는데 / 누릿 가운데 나곤 몸하 호올로 널셔 / 아으동동다리 – 고려 가요「동동動動」13절 중 ’정월‘

해마다 음력 정월의 입춘과 우수 절기가 돌아오면 강길이 열리고 상선과 나룻배들이 운행하기 시작합니다. 하면 겨우내 발이 묶였던 임도 떠나고 세상천지에 홀로 남겨지는 처지가 되겠지요. 몸과 맘이 새로워지는 때이지만 동시에 임을 보내야만 하는 역설의 봄- 그런 역변은 신라 진흥왕 시절 우륵이 제자의 음악을 듣고 탄식한 바로 그 표현일 것입니다. “낙이불류樂而不流 애이불비哀而不悲: 즐거우면서 방탕하지 않고, 애잔하고 비통하지만 슬픔에만 빠지지 않는다!”(『삼국사기』지志 제1)  

새롭게 만물을 보는 새봄입니다. 부디 겨울 같던 시련의 세월을 견디고 이겨낸 날들이 다가오는 봄날에 빛을 발하시길 비손합니다.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서대전고,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전MBC와 TJB대전방송, STB상생방송에서 프로듀서(1987-2014)를 역임했다.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부문 입선(2020) /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 / 제29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특선(2023): 제28회 같은 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했다. 산문집『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 『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를 펴냈고, 현재 충북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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