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 오늘은 24절기의 3번째인 경칩입니다. 우수, 계칩啓蟄이 지나면 얼었던 대동강물도 풀리며 초목의 새싹이 돋고, 겨울잠의 동물들도 깨어나는 완연한 봄날이 펼쳐집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채취하는데 위장병에 효능이 크다고 합니다. 오래전부터 제철의 천연 약재를 중시하던 민간처방이 이어지는 일이지요.

또한 개구리나 도룡농 알을 건져다 먹기도 했는데 허리통증을 완화하고 허약한 몸을 보양한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각종 영양제가 넘쳐나는 지금은 찾는 이들이 거의 없을 성싶습니다. 아무튼 이제 봄비 내리는 날 경칩에 깨어난 개구리들의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요.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경칩송驚蟄頌」(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경칩송驚蟄頌」(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 책은 중국 여행기로 1780년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널 때부터 열하熱河를 거쳐, 북경으로 돌아온 8월 20일까지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행되자마자 문체반정의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당시 사신과 그 일행의 점잖은 연행문학과는 질적으로 달랐는데 조선의 야사, 민담은 물론 청나라 관리와 하인들의 농담도 소개하며 풍자와 해학을 가미한 소위 패관稗官문학류의 기행문인 것입니다.  

요동벌 가이 없어 / 한 열흘에 산을 못 보네 / 샛별은 말 앞에 지고 / 아침해 밭가에 뜨네  

연암은 일기 전편에 다양한 양식을 한껏 구사하고 있습니다. 여정의 시적 표현, 촌철살인의 아포리즘, 패사稗史적 소품, 정통고문 등 한문의 모든 양식을 통해 청과 조선의 문명론, 인물론, 종교론, 상업론 등 활달하게 기술했습니다. 그 결과 26권 10책 전권 중에는 ‘도강록’, ‘호곡장’, ‘삼류선비론’, ‘일야구도하기’ 등 『열하일기』를 한민족의 영원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는 ‘별쇄본’ 같은 명문장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경칩송驚蟄頌」(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경칩송驚蟄頌」(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호곡장好哭場: 울기 좋은 터- 7월 8일 여정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 인생이란 본디 어디에도 의탁할 것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돌아다니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선의 압록강 건너 그 요동벌판- 드넓은 광야에서 홀연히 솟구친 내적 감정의 폭발입니다. 동행하던 정진사가 의아해하며 묻습니다. “별안간 통곡을 생각하시다니 무슨 연유이신지...”

“사람들은 다만 ‘희노애락애오욕’ 그 칠정七情 가운데서 오직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지만 사실 칠정 모두가 울 수 있는 심정들이지.” 광활한 벌판에서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협소한 땅에서 살아왔는지 그런 회한과 함께 하늘과 땅 사이의 자신을 새삼 재발견한 것입니다.  

정진사가 재차 묻습니다. 이 좋은 울음터에서 통곡하자면 칠정 중 어느 정이 발동할까요? 연암은 느닷없이 갓난아기에게 물어보라며 일갈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캄캄하고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탁 트이고 훤한 세상으로 나왔으니 그 첫 울음은 기쁨의 절창 아니겠는가...” 연암의 여정 29년 후인 1809년 추사 김정희는 연행을 다녀와 「요야遼野」라는 시 26행 중 이 ‘호곡장’을 평결합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경칩송驚蟄頌」(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경칩송驚蟄頌」(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천년이라는 긴 세월의 울음터라더니 / 갓 세상에 나와 우는 아이에 비유했네  

삶과 죽음에 대한 외경심의 울음- 칠정 그 인간적 감정이 뒤섞여서 터져나오는 깨침의 울음은 곧 웃음이겠지요. 핏덩이 아기는 울지만 그 탄생을 지켜보는 피붙이들은 웃음 짓는 바로 그런 역설일 것입니다. 훗날 아이는 자라면서 관습과 편견, 통념에 사로잡혀 첫울음의 진정성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북해악이 말했다. 우물 속에 있는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해 말해도 소용없는 것은 개구리가 좁은 곳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벌레에게 겨울 얼음에 대해 말해도 별수 없는 것은 그 벌레가 계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오! -『장자壯者』제17편 추수

본격적인 새봄입니다. 이제 긴 잠에서 깬 개구리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것은 온갖 고난과 시련의 겨울을 이겨낸 승전가일 터. 경칩은 바로 만물의 회생 그 개선행진곡을 듣기 시작하는 벅차고 기쁜 절기입니다. 물론 겨울 외투처럼 나를 감싼 공고한 편견과 아집, 불통을 과감하게 벗어던져야 그 노래와 울음소리에 화답할 수 있겠지요.

저 400여 년 전 연암과 추사의 ‘울음’이 저의 올해 경칩송驚蟄頌입니다. 봄은 동사 ‘보다’의 명사형인데 새봄은 ‘새롭게 만물을 보는’ 절기입니다. 활연대오豁然大悟- 이 신춘에 새뜻한 ‘바다와 얼음’ 같은 소식, 기별 전하는 ‘한 소리’ 듣고, 거듭 깨치길 갈망합니다. 부디 이어지는 봄날에 건승, 건필하시길 비손합니다.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서대전고,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전MBC와 TJB대전방송, STB상생방송에서 프로듀서(1987-2014)를 역임했다.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부문 입선(2020) /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 / 제29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특선(2023): 제28회 같은 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했다. 산문집『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를 펴냈고, 현재: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 / 영동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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