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극한의 이상기후가 지구를 강타하고 있습니다만 8월 8일 오늘은 입추立秋입니다. 한 철에 6개씩, 보름마다 24번 갈마드는 1년의 절기상 13번째 날인 것입니다. 지난 봄철의 산불과 여름 장마와 폭염이 역대급이었지만 잘 이겨냈고, 앞으로 몇 차례의 태풍도 슬기롭게 대처하리라 믿습니다.

기실 동서고금 유사 이래 사람들의 가정과 사회, 국가 그 어느 구성체 하나 잠잠한 날과 계절이 있었을까요? 희노애락을 위시한 그 사단칠정이 적멸하지 않는 한 무한히 되풀이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500여 년 전의 『시경詩經』도 그런 사람 한살이의 고통과 불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입추」(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그 어떤 풀도 시들고 어떤 날도 간다 / 어느 누구고 길 걷지 않나 사방에 일이 많다네 // 무슨 풀이고 마르지 않고 어느 누구고 병들지 않던가 / 슬프게도 이 나그네는 홀로 사람 구실 못하는 듯하다 // 외뿔소와 호랑이가 넓은 들을 쏘다니고 있다네 / 슬프게도 이 나그네는 아침이고 저녁이고 쉴 겨를 없네 // 텁수룩한 여우가 무성한 풀밭을 쏘다니네 / 높다란 수레가 한길을 달리고 있네  -『시경詩經』제2편 소아小雅 14

중국 고대의 하은주夏殷周 시대- 그 주나라가 멸망할 무렵 백성들은 강제 징집되는 노역勞役이 끊이지 않자 이렇게 노래하며 서로 달래고 보듬었던 것입니다. ‘외뿔소와 호랑이’가 발호하듯 나라 간의 전쟁이 이어지고, ‘여우무리’ 같은 고관대작의 수레가 먼지를 일으키며 민가를 들쑤시는 나날- 하지만 그래도 새파랗던 풀들이 시들듯 그 힘겨운 날도 언제인가 반드시 기필코 지나가리라 참아냈습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입추」(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입추」(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부분

저는 일찍이 한자 ‘춘하추동’을 우리말 ‘볼열갈결’로 새겨왔습니다. 이는 1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알짬으로 사람의 한평생, 한뉘의 본령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보는 새봄을 맞고, 여름날에는 열매를 맺고, 가을이면 갈무리하고, 겨울철이면 매조지 하는 천지운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목이 누렇게 변하듯 사람들의 청춘도 황혼을 맞게 만들며 회두리에 처음 온 그 본향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그 무엇이 있겠지요.  

‘고전’의 힘은 그럴 성싶습니다. 저마다 한 번뿐인 인생에 시공을 초월해 위로와 격려를 주며 희망찬 앞날을 노래하는 진리의 향연- 그 주체는 바로 ‘사람과 자연’입니다. 때문에 사람은 자연과 사람에게서만 배우는 법인데 앞의 것은 나이가 들면서 체현하며 깨치는 반면에 고전은 늘 오래 곁에 두고 가르침을 얻는 사람의 책입니다. 저는 단 한 권을 꼽으라면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입니다.

무명천지지모無名天地之母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 이름 없음이 만물의 시작이고 이름 있음이 만물의 어미다(제1장) / 복귀어무극復歸於無極: 끝이 없음으로 복귀한다(제28장) / 천하만물생어유天下萬物生於有 유생어무有生於無: 천하 만물은 있음에서 나오고 그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제40장) / 이천하관천하以天下觀天下: 천하 사람들의 입장에서 천하를 살핀다(제54장)

『성경』의 천지창조처럼 그 말씀의 명명命名 곧 이름을 얻어 만물의 시작과 인생이 열립니다. 『논어』의 공자 역시 “必也正名乎: 반드시 명분을 바로 잡겠다!”(제13편 자로)며 그 유명한 정명론을 내세웠습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제12편 안연)- 통치자가 바뀌는 것처럼 사람들도 나이가 들수록 지칭에 따른 ‘신분’도 변하는 것입니다.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입추」(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김래호 작가의 글자그림 「2023년 입추」(한지에 수묵캘리: 70✕70cm)

경계 없는 사방 같아도 이름을 얻어 동서남북이 되고 각자 숫자를 지니고, 서로 밀고 당기며 사계절을 만드는 법. 자연을 좇아 살라는 뜻은 거스릴 수 없는 시간 속에 변하는 자신을 돌아보라는 권면일 것입니다. 부디 모쪼록 몸과 마음 청안하신 가운데 자아 찾는 진정 아름다운 인생의 가을 여정 이어가시길 비손합니다.

강물이 흘러 이름과 형태를 버리고 바다에 잠기듯이, 그렇게 지혜로운 이는 이름과 형태에서 벗어나 높고도 높은 성스런 인아에게로 다가간다. - 인도 고대경전 『문다까 우파니샤드』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

김래호 작가는 1959년 충북 영동 출생으로 서대전고, 충남대 국문과,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전MBC와 TJB대전방송, STB상생방송에서 프로듀서(1987-2014)를 역임했다. 1980년 동아일보신춘문예 동화 당선, 제20회 전국추사서예휘호대회 한문부문 입선(2020) / 제19회 충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 / 제29회 대한민국서도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특선(2023): 제28회 같은 대전 캘리그라피 부문 입선(2022)했다. 산문집 『문화에게 길을 묻다』(2009), 『오늘: 내일의 어제 이야기』(2016)를 펴냈고, 현재 충북 영동축제관광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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